한 번 더

인수인계 정리를 하고 있는데, 옮기기 전에 점심 한 끼 같이 하자는 선배 신부님의 전화 한 통이 왔다.

나는 성공회 신자가 된 지 12년째인데, 그분은 성공회 사제로 살아오신 지 24년이 된 분이다. 몇 해 전, 무척이나 바쁘시던 때에 주제를 보시고 M.Div 논문 지도를 해주신 은사.

밥 한 끼 같이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한 명의 동료 사제로 염려와 고민을 나누시는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성공회 바깥에도 많이 알려져 있는 학자이자 신부인 선배 신부님. 그래서 무척 기대가 컸고, 그만큼 아쉬움도 많았던 분. 그런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찾아 뵈어 직설적으로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쏟아 내곤 했었다. 그때마다 한 명의 스승이자 선배, 그리고 동료로 심중에 있는 안타까움을 가감없이 나눠주곤 하셨다.

그렇게 밥 한 끼 나누며, 심중의 고민과 안타까움 그리고 계획들을 나눈 뒤에 일어서다가 한 번 더 당부하신다.

“여기 있으면 이런저런 일들과 핑계로 차분히 고민하거나 들어야 할 일들에 대해 듣지 못할 때가 많아. 언제든 찾아오거나, 전화해서 얘기해줘.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기대가 큰 만큼 아쉬움도 크고, 아쉬움이 커지는 만큼 적당한 관계가 될 때가 많다. 그리고 ‘스승’이나 ‘선배’라고 불리는 이들은 늘상 뭔가 가르치고 싶어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로 만난 이들의 ‘차이’가 ‘다름을 통한 연대’가 되기는 참 어렵다. 오히려 일방적인 교정 대상이나 타이르는 관계가 되기 십상이다.

난 그래서 ‘한 번 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적으로 설정된 관계가 작동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것, 한 번 더 말을 거르는 것, 상대를 존중하고 있는지 한 번 더 살펴보는 것.

각자도생(各自圖生)이 아닌, 느슨하게 어깨동무하고 ‘따로 또 같이’하는 길을 가는 동료가 되는 관계. 성공회 사제로 포기할 수 없는 지향 가운데 하나. 아쉬움이 커지는 만큼, ‘당신은 그런 사람이야’라고 단정해 버리지 않고 한 번 더 다가가는 용기가 필요한 관계.

밥 한 끼가 아닌, 밥 한 끼 나누며 주고받은 심중의 이야기들 때문에 배부른 오후다.

"스승이면서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다. 친구이면서 스승이 될 수 없다면, 그 또한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 64쪽.


* 덧붙임. 제가 인수인계, 사직서 등의 얘기를 하니깐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ㅎㅎ 헌데 제가 속한 대한성공회는 다른 개신교회나 일반 직장처럼 '청빙제(계약제)'가 아닙니다. 한국천주교회처럼 '파송제(발령제)'에 가깝습니다 ^.^

성공회 소속 학교나 복지관 등의 기관에서 일하는 경우에는, 법인에서 파송받는 형태와 그쪽에서 채용되는 절차를 함께 진행하죠. 그래서 이력서와 사직서 등을 써야 하는 겁니다.

교단에서 사고(?)치거나 문제 생겨서 사직서 내고 떠나는 게 아니라, 다른 곳으로 파송받아 가는 거니깐 너무 걱정들 하지 마소서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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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5/08/18 01:46 2015/08/18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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