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사용 못하는 SNS에 두 가지 이야기가 넘쳐난다.

'차별금지법'에 대해 반대를 위해 우익과 결합된 일부 보수 개신교파에서 왜곡 확장하고 있는 '호모포비아'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이야기와 그에 대해 여러 관점에서 비판하는 이야기 하나.

이를 포함하여 왜곡된 여러 '~포비아'에 반대하는 개신교 내 여러 개혁적 목소리를 '순혈주의'와 결합한 '근본주의'의 입장에서 비방하는 박 머시기라는 보수 개신교인의 동영상. 그에 대한 안타까움과 답답함을 얘기하는 이야기 하나.

바쁘다는 핑계로 이런 저런 글들을 지나치디가 생각 정리.


1. 동성애이든 교회 개혁의 목소리이든 '절대 악'처럼 접근하는 어떤 태도에도 저는 반대입니다. 이 모두가 '살아 숨 쉬는 삶'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모든 문제는 삶의 차원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2. 동성애자 또한 '삶'입니다. 그분들도 사랑에 빠지고 두근거리며 설레이며 서로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빙그레 웃습니다. 그들 안에도 우리 하느님의 숨결이 담겨 있으며, 우리 하느님과 교감할 수 있는 생명의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도 우리처럼 질투하고 싸우며 인간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온갖 실수와 잘못들로부터 자유롭지 않기도 합니다.


3. 그렇지만 그들은 악마이거나 잘못 창조된 존재가 아닙니다. '동성애자 = 병자'라고 무식하게 일반화시켜서 정리해 버릴 문제는 더 더욱 아닙니다. 그들은 '병자'이니 순화시켜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이들은, 기존 사회가 가르치는 기준과 규칙에 얼마나 잘 맞느냐를 가지고 사람을 나누고 분류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 기준에 맞는 사람은 일등 시민, 모자라면 이등 시민, 별나면 시민도 아닌 존재인 건가요?


4. 그분들은 말 그대로 '사람'입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가 뭘까요? 우리가 되셔서 우리에게 생명과 해방 그리고 구원으로 초대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선물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 가운데 관용하고 포용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불관용을 제외하고서 모든 것은 '사랑의 원칙'에 의해서 이뤄졌습니다.


5. 그리고 이 사랑의 원칙을 친히 사람이 되셔서 보여주셨습니다. 심지어 악한 영들의 속삭임에 사로 잡혀서, 보고 들은 것을 믿지 못하는 우리의 불신과 위협을 온 몸으로 품고 잉태하시어 생명으로 돌려 주셨습니다. 이런 '사랑'은 다시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하기 보다는 저주합니다. 품기보다는 분리시킵니다. 심지어 우리가 그분들보다 우월한 존재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6. 저는 문장 하나 덜렁 인용해서 성서가 내 주장을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만드는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옳다고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럴 땐 정말 이 말씀을 되새겼으면 싶습니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마태 20:16)

우리는 그저 주님의 은총으로 '먼저 축복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먼저'라는 것도 그저 우리 관점에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먼저' 나 '나중'이나 결국 주님께서 정하실 몫이지 우리가 '먼저'라는 기득권을 내세우면서 다른 이들을 '배제'할 수 있는 권리나 의무는 없습니다.


7. 오직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이자 의무는 '사랑할 권리이자 의무' 밖에 없습니다. 온전하신 주님께서 불완전한 사람이 되셔서 우리에게 친히 보여주시고 그 오랜 저주와 왜곡을 생명으로 바꿔 주신 것처럼 우리는 그 길을 따를 권리와 의무 밖에는 없습니다.


8. 그러니 주님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불관용'에 대해 관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또한 사랑의 태도와 입장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삶을 삶으로 인정하고 사랑해야 됩니다. 마치 등급이 있고 절대적으로 완벽한 것이 있어서, 더 좋은 등급으로 올라가고 더 완벽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처럼 속삭이는 어둠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9. 삶은 그것 그대로 삶일 뿐입니다. 때로 조각난 것처럼 보이고 누더기처럼 보이는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모으면 아름다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 조각보들을 모아 하나의 십자가를 이루는 '무지개 켈트 십자가'처럼 말이죠. 삶을 삶으로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고 우리를 그렇게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들어 쓰셨는데, 우리가 뭐라고 등급을 나누고 온전하다 아니다 비방합니까?


10. 불관용에 대해 관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유혹되지도 않아야 합니다. 주님이 그러하셨듯이 왜곡된 거짓 '~포비아'들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기도할 것은 이를 '어떻게 주님의 가르침인 사랑의 윤리와 태도 그리고 겸손으로 실천할 것인가?' 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덧붙임 :
이 때 조심해야 하는 게, '사랑할 권리이자 의무'가 교회와 사회에서 위임된 영향력을 갖는 지도자들의 타락이나 거짓에 대한 눈 가리기나 입 막음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약과 구약(히브리) 성서에서 거의 천여 번 언급하고 있는 '공정한 부의 재분배'와 '가난한 이에 대한 착취 금지'에 대해 응답하지 않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회개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을 왜곡하거나 침묵하는 '지도자들의 위선과 거짓'에 관한 분노입니다. 이는 불관용에 대해 관용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 위에 있는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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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3/04/12 16:23 2013/04/12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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