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위의 chaplain

"노동자이자 신부? 노동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신부? 경계 위의 chaplain."

식민지가 많았던 영국. 그들의 국가교회였던 영국성공회(Anglican Church). 그래서 영국성공회의 식민지이었거나 영국성공회 선교사가 주류이었던 선교지 교회들은 대부분 영어 표기에 ‘Anglican Church’가 들어가 있다. 한국도 그 중 하나.

그리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영국성공회는 식민지나 선교지에 ‘채플린'(chaplain)이라 불리던 해군 군목들의 파송이 잦았다. 그들은 교회와 더불어 병원과 학교를 통한 개화와 계몽, 그리고 선교에 꽤나 공을 들였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얘기한다지만, 그들은 꽤 오래 전부터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chaplain ministries’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영국에서 ‘chaplaincy’ 과정을 공부하고 돌아와, 현재 부산교구에서 사목 중인 노철래 신부님의 자료에도 이런 내용이 잘 나와 있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내용들. 2차대전 이후에 현대적인 chaplaincy 개념에 대해 갈등하고 고민하던 영국성공회. 그들은 2차 대전 이후에 줄곧 '특별/전문 사목'(specialized ministry)으로 이해하던 chaplaincy를, 1983년에 '영역/현장 사목'(sector ministry)으로 정의내렸다고 한다. 교구 중심인 영국성공회에서 지역교회를 ‘보완'하는 ‘특별하고 전문적인 사목’에서, 자신만의 ‘영역/현장’이 있는 사목으로 인정받았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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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렇게 ‘경계 위의 사목’이 ‘현실’이 되는 순간, 꽤 험한 가시밭길이 시작된다. 'chaplaincy' 개념이 희박한 우리나라에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현재 성공회대학교 교목실 & 복지관에서 일하는 내가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이 바로 이것.  

주중에는 교목실 행정 스태프, 학교내 복지관 및 사회봉사 담당 스태프, 대학교회 도우미, 그리고 교목으로 일하고, 주말에는 길찾는교회 공동기획자로 자비량 사역을 감당하며, 때때로 광장으로 뛰어나가 연대하는 일에 참여한다.

거기다가 '광장과 책'이란 두 가지 짱돌을 좀 더 날카롭게 다듬기 위해, 2주에 1권씩 읽고 토론하는 강도 높은 두 가지 세미나를 진행 및 참여, 한 달에 한 번 선교적 교회 목회자들의 독서 모임에 참여한다.

그러다보니 하루 3-4시간이 허락된 수면 시간. 기관 사제들이 쉬는 날인 토요일에도 교회 관련 일이나 여러 일을 준비. 광장에 나가는 일도 앞뒤를 고려해서 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 에너지 소모는 심하고 회복은 더디다.

그리고 행정 담당 직원이자 채플 수업 담당 교수 중 한 명, 그리고 교목 신부. 행정 담당 직원으로는 질 높은(?) 서비스와 공정성을 요구받고, 채플 수업 담당 교수로는 학생들 눈높이와 마음을 담아내야 하며, 교목 신부로는 말 그대로 ‘신부 됨’을 요청받는다. 그 사이에서 오는 스트레스나 감정의 어긋남이 생각보다 심하다.

학기말이 다가오니 채플 행정 업무에 해당하는 1,300명, 사회 봉사 업무에 해당하는 몇 백 명의 학생들과 전화로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 강도 높은 감정 노동은 물론, 사용되는 에너지가 별로 긍정적이지 않다.

무엇보다 전화기 너머에 ‘응답기’가 아닌 ‘한 명의 노동자’가 있다는 걸 어떻게 전해야 할까.

불편한 내색을 보이면, 바로 항의하는 태도로 싸우자고 하니 ‘비판의식’(?)이 뛰어나다고 해야 하나. 그나마 모든 학생들이 그런 건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들리는 말에 내가 신부라 상대적으로 조심하는 거라니, 그렇다면 ‘민주 노조’인 학교 직원들과 학생들의 관계는 대체 어떤건가. 그 사이에 작동하는 '미시적 권력 관계'는 어떻게 읽어내고 풀어야 하는가.

'노동자이자 신부'인가. 아니면 '노동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신부'인가. 경계 위의 chaplain에 대한 질문은 늘어만 가는데.. 아직 답은 없고, 고민은 깊어지며, 몸과 마음은 지쳐간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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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4/06/14 18:27 2014/06/14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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