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리는 서로 다릅니다. 그것도 꽤 많이 다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말로 얘기해도, 당신은 내가 될 수 없고 나는 당신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 식구들끼리도 그렇고, 같은 인종이나 국민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일 뿐입니다.

당신의 고통을 내가 대신할 수 없고, 나의 고통을 당신이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나눔을 이 얘기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우리는 큰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어져 있든, 보편적인 인류애로 이어져 있든, 온 세상이 망하여 모두가 사라지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서로의 고통을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서로의 상황이나 일상도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게 성공회 신부가 할 말이냐고요? 네. 신부가 할 말입니다. 한 공동체의 사목자는 ‘거짓 희망’을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과 진실’을 밝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과 진실을 딛고 넘어설 희망 한 조각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그 희망이 되는, 우리의 영원한 좌표가 되시는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한 명의 안내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아프더라도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자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곁에 있는 그 사람의 현실이나 상황을 잘 모릅니다. 그 사람의 아픔이나 고통은 더 더욱 잘 모릅니다. 아는 척할 수는 있어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2016년,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기도 주간’(Week of Prayer for Christian Unity)을 맞이한 그리스도교 신앙은 여기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공회 신자라고 고백하는 건, 이 현실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일에서 우리들의 ‘성서, 전통, 이성’을 활용하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를 넘어서는 일에 우리들의 신앙을 ‘디딤돌’로 삼겠다는 고백이자 증언인 것입니다.

이런 기준과 태도를 가지고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을 다시 한 번 마주합시다. 무엇이 보입니까?

오늘 독서인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바울로 선생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그 몸이 되는 기준은 오직 하나, ‘세례’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세례는 오직 ‘한 성령’으로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세례를 통해 한 성령을 받아 마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이는 켈트 그리스도교에서 강조했던 것처럼, 우리 안팎에 충만한 성령에 잠기고 그 성령으로 채워져 숨쉬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공기에 둘러싸여 있고, 그 공기가 우리 안에 가득 차야만 우리가 숨쉬며 살아갈 수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세례라는 상징에 이어진 사람은, 세례라는 행위에 동참하고, 세례가 가리키고 가르치는 모든 것에 동의하기를 시작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의 상징에 참여한다는 것은 행위와 고백 모두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사람만이 우리가 처한 현실과 우리의 한계를 정확하게 인정하며,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시도를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우리의 현실과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디딤돌은, 오직 ‘주님의 성령’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받은 사람은 주님의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주님의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나 자신과 우리의 이웃들에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세례받기 전의 나. 나의 현실과 상황 그리고 고통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는 한계 속에 갇혀살던 나와 선을 긋는 것입니다. 그런 나를 인정하고 떠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과거의 나, 한계에 갇힌 나를 떠났다는 것은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을까요? 오늘 독서인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 12장 22절을 봅시다. “그뿐만 아니라 몸 가운데서 다른 것들보다 약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복음 말씀인 루가의 복음서 4장 18~19절을 봅시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렇습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있는 약한 지체, 나아가 이 사회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 제 식으로 말하자면 ‘언저리 사람들’을 기준으로 사는 사람과 공동체만이 과거의 나, 한계에 갇힌 나를 떠난 사람과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보다 더 언저리에 있는 사람. 그들에게 실현되는 복된 소식을 위해 살아가는 나와 우리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나와 우리가 기준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더 언저리로 밀려난 사람들이 기준입니다. 더 연약한 사람들이 기준입니다. 세례받은 사람과 공동체라고 말할 때에 요구되는 기준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와 우리보다 더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과 공동체에게 흘러가는 배제와 소외 그리고 혐오와 싸우는 사람들이, 바로 성서가 가르치고 증언하는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그렇게 더 다양한 배제와 소외 그리고 혐오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세례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초대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런 목격자와 증언자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 오늘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잠시 묵상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2016년 1월 24일, 연중 3주일,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기도 주간.

* 1독서: 느헤 8:1-3, 5-6, 8-10 / 2독서: I고린 12:12-31 / 복음: 루가 4: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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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치’는 ‘더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과 공동체’를 기준으로 작동되어야만 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교 일치의 정신이자 온전한 실현. 우리 각자와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

그 간단한 말을 이리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한계 앞에서 헛웃음만 나오는데.. 뭐, 어쩌겠는가.. 이게 나인 걸.. 이런 나를 통해서도, 이런 부족한 사람과 함께해 주는 사람들의 삶과 신심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믿는 수밖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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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6/01/27 02:42 2016/01/27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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