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저는 오늘 1독서와 복음 말씀을 읽을 때에 약간 감정이입이 됐습니다. 왜냐면 ‘과부의 가정’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기록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과부’라는 표현을 잘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남편을 잃은 여인’이라고 해도 그 뜻이 충분히 통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남편을 잃은 여인’이라는 게 왜 중요한 일일까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친족사회에서 한 가정과 마을, 나아가 국가와 민족의 보호자는 남자 어른이었습니다. 사회의 기준이 그들이었습니다. 그 시대는 육체 노동과 일상적 폭력의 시대이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에서도 남자 어른의 숫자만 기록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만큼 그 사회는 이스라엘 남성 어른 중심이었습니다. 친족, 다르게 표현하면 가문 중심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가장 기본 단위는 ‘아버지의 집’이라 부르는 남성 어른 중심의 가족입니다. 그 뿌리에는 부계 중심의 친족과 지파가 있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남자 어른의 역할이 중요했습니다. 그 남자 어른들로 연결되어 구성된 ‘친족’. 그리고 어떤 맥락에서는 배타적인 공동체일 수밖에 없던 ‘마을’이 생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친족을 이어주던 남편을 잃은 여인은 홀로 자녀를 키워야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성 혼자서 아이를 키우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습니다. 과거에는 더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겁니다. 단순하게 홀로 아이를 키운다는 문제가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생계와 안전의 문제에 심각한 위협을 겪었습니다.

저도 이혼한 어머니 밑에서 장남으로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 남편 잃은 여인의 가정이 겪었을 어려움에 대해 조금은 이해합니다.

남편을 잃어 친족으로 구성된 가문과 연결 고리가 끊기면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다만 그 남편과 낳은 아들은 부계 중심 가문과 그녀의 가정을 이어주는 또 다른 고리 역할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라도 친족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그 도움은 그녀의 가정이 겪어야만 하는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줍니다.

그런데 오늘 1독서와 복음서에 등장하는 여인의 가정들은 그 아들마저 잃습니다. 그녀의 가정을 친족들과 연결해주던 연약한 고리마저도 잃었습니다.

그 앞에 하느님의 예언자인 엘리야와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소리쳐 외칩니다. 야훼 하느님께 그 힘겨운 삶을 이어가는 여인이 보여준 친절에 대해 말합니다. 그녀의 아들에게 ‘생명의 호흡’을 되돌려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고통에 ‘측은한 마음’, 다시 말해서 그녀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그녀에게 울지 말라며 위로하시고, 그녀의 아들을 죽음으로부터 깨워 일어나게 합니다.

하느님의 예언자로 아들 잃은 여인에게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불린 엘리야. 하느님의 아들로 사람들에게 “위대한 예언자”라고 불린 예수 그리스도. 이 둘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하느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기적의 통로가 된 존재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기적은 그 시대와 사회 가운데 가장 위로가 필요한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어린 외마디와 울음’을 마주할 때에 시작됩니다. 엘리야도 예수 그리스도도 그 고통과 통곡을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과 외마디 그리고 울음을 방관하지 말고 끌어 안습니다. 그 울음과 죽음을 멈춥니다. 엘리야는 여인의 죽은 아들을 안습니다. 예수께서는 외아들의 죽음으로 슬피 우는 여인을 위로하시고 상여를 멈춥니다.

그 이후에 생명의 호흡을 되돌아 오게 합니다. 야훼 하느님은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 여인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인의 죽은 아들을 죽음으로부터 깨워 일으켰습니다.

이 시대와 사회 가운데 수많은 고통과 울음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람’이라 불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도 엘리야와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 고통과 통곡을 마주해야 합니다. 그것들을 끌어안고 위로하며 멈춰야 합니다. 생명의 호흡을 회복해야 합니다. 간절히 하느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죽음 가운데 누워있는 그 사람들을 깨워 일으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와 사회 가운데 생명의 호흡을 회복하는 것이 간절한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일까요?

하느님의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죽음 가운데 누워있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우리가 깨워 일으켜야 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아직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일까요?

오늘의 시편인 146편 9절은 “야훼, 나그네를 보살피시고, 고아와 과부들을 붙들어” 주는 분이라고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의 가르침, 율법 준수 그리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는 수많은 노래와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강조하고 계신지 말입니다.

그것은 ‘나그네, 고아, 과부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보호하라’ 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스라엘 사회에서 ‘나그네, 고아, 과부’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고려되고 보호되었을까요?

우리는 성서가 ‘희년’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반복되는 강조를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실제로 희년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반추해 볼 수 있습니다.

‘나그네, 고아, 과부’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보호하라는 성서의 반복되는 강조를 통해서도, 우리는 실제 이스라엘 사회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하느님을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보호자”(시 68:56)라고 강조해야만 했겠습니까?

성서가 말하는 ‘나그네’나 ‘객’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여행객이나 손님이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 있던 피난민이거나 이방인, 또는 같은 이스라엘 사람일지라도 다른 지파 땅에 머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지칭하던 말입니다.

이스라엘 남성 어른의 친족 중심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보호받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항상 생존을 걱정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의 권리는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의식주와 권리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누군가로부터 허락되어야만 했습니다. 의식주와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누리던 그 시대와 사회의 주류인 사람들이 다 누리고 남은 것들을 얻거나, 그들의 기준에 맞춘 허락을 받아야만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사회를 향해서 하느님은 여러 통로를 통해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나그네, 고아, 과부라 부르는 사회적 약자의 보호자다. 그러니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마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보호해라. 그것이 너희가 내 백성으로 계속 존재하는지 확인하는 기준이 되는 율법의 가르침이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이 시대와 사회 가운데 생명의 호흡을 회복하는 것이 간절한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하느님의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 죽음 가운데 누워있는 사람들, 우리가 깨워 일으켜야 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우선적으로 이 시대와 사회 가운데 ‘나그네, 고아, 과부’라고 불리는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와 사회 가운데 고통받으며 슬피 울며 통곡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마주해야 합니다. 그 고통과 외마디 그리고 울음을 방관하지 말고 끌어안아야 합니다. 그 울음과 죽음을 멈춰야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호흡을 회복하도록 함께해야 합니다. 그들이 겪고 있는 죽음으로부터 깨워 일으켜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어렵더라도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이 시대와 사회 가운데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유령 취급하는 사람들과 마주해야 합니다.

이 시대와 사회 가운데 자신들이 누리는 ‘당연한 것들’을 다 누리고 남아야 나눠주는 사람들. 자신들의 기준에 맞추는 사회적 약자들에게만 의식주와 권리를 허락하는 사람들.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또다른 죽음’과도 마주해야 합니다. 그들을 그 죽음 가운데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깨워 일으켜야 합니다. 하느님이 허락하신 생명의 호흡을 회복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그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과 싸우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람이라 불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대와 사회의 사회적 약자들이 경험하는 죽음. 그 사회적 약자들을 유령 취급하는 사람들. 그들이 누리는 ‘당연한 것들’을 남아야만 나눠주거나, 자신들의 기준에 맞춰야만 허락해주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또 다른 죽음.

우리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호흡을 가지고 그 ‘죽음들’을 마주해야 합니다. 그들을 그 죽음들로부터 깨워 일으켜야 합니다. 생명의 호흡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님과의 진정한 동행이며 선교입니다. 그것이 복음이고 구원이며 진정한 해방이자 하느님의 나라로의 초대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잠시 묵상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2016년 6월 5일, 연중 10주일

* 1 독서, 열왕상 17:8-24 / 2 독서, 갈라 1:11-24 / 복음, 루가 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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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6/06/05 04:12 2016/06/05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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