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5주일, 밀알이란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은 그분이 언제 어디서든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감시’하고 있다는 게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자 존재 긍정의 씨앗으로, 우리를 살게 하는 분이란 의미다.

그렇게 우리 안에 ‘밀알’로 오신 하느님. 그 밀알은 우리에게 와서 밀알 그대로 존재하지 않았다.

매튜 폭스 신부는 다음과 같은 에크하르트의 말에 주목한다. “하느님의 씨앗이 우리 안에 있다 ... 개암 씨앗은 개암나무로 자라나고, 하느님의 씨앗은 하느님으로 자란다.”

이 말은 하느님의 씨앗이 우리 안에 밀알처럼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안에서 죽고 썩어 우리의 피와 살, 그리고 호흡과 영혼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씨앗, 그 밀알은 우리 안에 잠시 머무는 ‘썩지 않는 신성(神性)’ 같은 게 아니다. 어떤 도인들의 주장처럼 우리 안에 잠시 머무는 신성이 있어, 우리의 수행으로 그 신성을 깨워 ‘신을 쫓는 좌표’로 삼는 게 아니다.

이건 마치 우리 안에 우리와 다른 성질의 신성이 ‘자석 파편’처럼 존재하고, 그것이 ‘커다란 자석’인 신에게 우리를 이끈다는 주장과 유사하다. 이야말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경계하던 영지주의나 이원론이다.

하느님의 씨앗, 그 밀알은 우리에게 잠시 주어졌다가 시기가 되면 거두어 가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밀알은 우리 안에서 죽고 썩어 우리와 하나가 되었다. 우리 안팎에서 지속적으로 우리를 살게 한다.

매튜 폭스 신부의 말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들’이 되도록 한다. 그렇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방식’대로 하느님의 창조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한다.

하느님과의 계약 관계 안에서 ‘그저’ 보호받고 따르던 관계에서, ‘새로운 계약’으로 하느님의 창조에 동참하는 작은 창조자들이 되는 존재. 우리 각자가 구약 시대 제사장들에게 주어진 역할과 상징을 이어받은 ‘보편 사제’로 부름받은 존재.

이 모든 것을 가능하도록 만든 통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따르는 존재. 그렇기 때문에 현재 이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들과 구조 그리고 가치들을 섬기거나 따르기를 거부하는 존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존재다. 이 세상 통치자가 아닌, 우리에게 밀알로 오신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따르는 자들이다.

사순 5주일. 십자가 사건을 통해 수치와 조롱 가운데 자신을 믿던 이들의 눈 앞에서 높이 못 박힐 것을 예언하신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 그 십자가 사건으로 향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모습.

그분은 우리이고, 우리는 그분이다. 우리가 그의 편에 서 있는 한, 우리는 그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분이 먼저 우리에게 왔다. 그리고 당신의 성령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 이제 우리는 그분처럼 '작은 창조자들'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또한 이 땅에 교회를 존재케 하신 것은 우리가 서로의 '밀알'이자 '창조의 기록자들'로 동행하도록 하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불완전한 교회와 성서 그리고 우리들, 그 모습 그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들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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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22일, 사순 5주일
1독서, 예레 31:31-34 / 2독서, 히브 5:5-10 / 복음, 요한 12: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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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5/03/23 00:42 2015/03/23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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