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질문지에 대해 제가 정리한 답안지와 인터뷰 육성 파일은 사진 아래쪽에 ^.^;; )

뚜벅뚜벅 걷다 보면 뜻밖의 일이 생길 때가 종종 있다.

2년 전에 길찾는교회를 시작하게 된 것도 그렇고, 어느새 성소수자 인권 운동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참여하게 된 것도 그렇다.

어제는 뜻하지 않게 지역 라디오 방송과 생방송 전화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잘 들리지는 않지만, 그리스도교에도 다양한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한 번 정도는 알려도 좋지 않을까라는 단순한 생각에 수락했다. 그리고 방송 담당자 분들이 보내준 '질문지'를 받았다. 13가지의 질문.

질문지는 금요일에 받았는데, 늘 그렇듯이 일과 중에는 성공회대학교 교목실 업무에 집중하느라 열어 보지도 못했었다. 더군다나 지난 금요일에는 <구룡마을 현장 기도회>에서 기도회 인도와 설교, 애찬예식 진행을 해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토요일에는 '아이다호 데이' 추모 기도와 연대 발언. 일요일에는 길찾는교회 성찬예배와 몇 가지 문제 해결 등으로 정신 없이 보내고, 집에 돌아 오니 자정이 훌쩍 넘었다.

그때부터 질문지를 보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답을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20분짜리 전화 인터뷰를 위해서 담당자 분들이 준비한 13가지 질문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꼼꼼했다. 헉.. 질문 하나하나가 답변이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그렇게 쩔쩔매면서 준비를 끝내니 새벽 4시 ㅎㅎㅎ

결국 잠깐 베개에 머리를 대는 시늉만 하고는 출근 준비를 하고, 6시 50분 정도에 걸려온 전화 인터뷰에 응했다.

원래도 중저음에 울리는 목소리인데, 피곤한 상태에서 전화 인터뷰를 하니 가라앉는 목소리에 발음은 뭉개지는 것 같았다 =.,=;; 더군다나 13가지 질문 가운데 몇 가지만 묻겠지라고 생각했다가, 빠른 템포로 다음 질문을 이어가는 진행자의 질문에 당황해서 문장을 끊어서 답하지도 못했다 ㅎㅎㅎ

정신차려 보니, 이미 인터뷰는 끝난 상태. 비몽사몽한 상태로 출근해서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는데, 방송 담당자 분이 보내준 녹음 파일을 듣고는 웃어 버렸다. 읔.. ㅋㅋㅋㅋ

뭐, 라디오 생방송 전화 인터뷰야 이미 지난 일. 덕분에 13가지의 질문을 받았고, 그걸 정리하면서 최근 내 고민을 한 번 더 정리하는 귀한 시간을 얻었다고 입장 정리. 방송에서는 횡설수설했지만, 차분하게 정리해본 인터뷰 답안을 한 번 더 읽어 보니, 이런저런 생각들이 정리된다. 여기 블로그에도 그 기록을 남겨 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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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방송 FM 90.7MHz

아침 시사프로그램 ‘상쾌한 아침, 원기범입니다’ 

▶방송일시 : 2015. 05. 18 (월) 오전 7시 00분~7시 20분 전화연결

▶방송주제 :

<연속기획 - 거리의 성직자들2> - "교회 안에만 갇혀 있지 않으신 하느님"


▶오프닝

경인방송 <상쾌한 아침, 원기범입니다> 기획 인터뷰 <거리의 성직자들> 시간입니다. 안온한 교회와 절 대신 거리에서 신과 사람의 길을 함께 찾아나서고 있는 성직자들을 인터뷰하고 있는 시간인데요. 오늘은 두 번째 시간으로 성공회 자캐오 신부를 만나보겠습니다. 전화 연결돼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1. 성공회를 잘 모르시는 분도 있을 것 같아요. ‘성공회’는 어떤 종교입니까?

성공회가 궁금하신 분들은 구글 검색을 하면 첫 번째로 Wiki 항목이 나오는데, 그 정도만 보셔도 대략적인 건 아실 수 있을 겁니다 ^^ 제가 교목으로도 일하고 있는 성공회대학교를 세운 곳으로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고요.

성공회는 그리스도교, 그러니깐 보통 사람들이 기독교라고 부르시는 종교의 한 분파입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기독교도 다른 조직이나 종교처럼 많은 분파가 있죠. 동방정교회, 로마가톨릭, 성공회, 장로교회라고도 하는 개혁교회들, 감리교 등.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동방정교회는 전 세계에 2-3억 명의 신자가 있고 러시아정교회, 그리스정교회 등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죠. 로마 가톨릭, 그러니깐 천주교회는 보통 12억 명의 신자가 있는 걸로 알려져 있고요.

성공회는 8천 5백만 명에서 1억 명의 신자가 있고요. 현재 전 세계 165여 개국에서 활동 중입니다. 스스로를 ‘개혁하는 보편교회(Reforming Catholic Church)라고  표현하기도 하죠. 역사적으로는 16세기 당시 다양한 층위에서 분열되어 있던 서방교회의 명확한 분열이자, 종교개혁의 맥락에서 재구성된 교회입니다.

‘성서, 전통, 이성’이라는 세 가지 기준을 신앙의 중요한 기둥으로 여기는 교회이기도 하고요. 이 때문에 ‘다양성 속의 일치’를 숙제로 안고 있는 교회이고, 아는 분들에게는 ‘합리적 신앙’과 ‘적극적 사회 참여’ 그리고 ‘신비와 일상의 공존’으로도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2. 신부님께서는 ‘자캐오’라는 세례명으로 성직자의 길을 걷고 계신데요. ‘자캐오’라는 세례명을 쓰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자캐오는 개신교인 분들이 보시는 성서에는 ‘삭개오’라고도 하는데요. 보통 키작은 자캐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헌데, 제가 키가 작은 편이죠. 그래서 자캐오 ^^

성공회에서는 세례명을 신명, 그러니깐 신앙의 이름이라고도 하는데요. 루가의 복음서 19장의 ‘자캐오 이야기’는 제게 중요한 신앙의 화두이자 좌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수많은 ‘하느님의 뒤집기’를 전하는데요. 제게 자캐오 이야기는 그 중에서도 굉장히 강한 충격을 주었죠.

그는 성서를 통해 키작은 사람, 모든 인간의 욕망을 따라 돈과 명예를 좇아 살던 ‘세리장’으로 전해집니다. ‘자캐오’라는 이름의 뜻은 '순결'이었는데, 세리장이라는 직업을 가진 그는 유대인들에게 ‘로마제국의 앞잡이’인 ‘불결’하고 ‘부정’한 사람이었을 뿐인 거죠. 이런 맥락에서 바라보면, 어떤 면에서 자캐오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돈과 명예로 포장하려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그가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싶었죠. 하지만 부정한 자캐오는 차마 주님 곁에 가지 못하고, 멀리서 멀리서 지켜보다가 예수에게 끌리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어 세관장의 체면은 뒤로 한채 나무 위로 올라가 주님을 보려 했죠.

그 자캐오를 보신 예수님. 그분은 관례를 깨고 자캐오를 불러 그의 집에 ‘손님’으로 머무시고, 심지어 그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구원받은 자’임을 선포하십니다. 그 일을 지켜보면 유대인들이 받았을 충격은 꽤 컸을 겁니다. 그들의 ‘통념’을 뒤집어 버리셨으니깐요.

그리고 그런 ‘하느님의 뒤집기’에 자캐오도 적극적으로 응답합니다. 부정하게 얻은 재물을 4배씩 더 얹어 갚겠다고 서약한 것이죠. 이는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것도 아니고, 또한 당시 관례나 통념을 뛰어 넘은 것이기도 하죠.

그는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사람 자캐오’를 보고 계시기에, 더 이상 거추장스러운 돈이나 명예로 자신을 ‘포장’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는 부자들에게 자신의 삶으로 ‘증언’한 겁니다. “그 거추장스러운 자리에서 내려오라! 모두 내어 놓아라. 당신들의 것이 아닌 그것들을 원래 주인들에게 돌려주어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말한 겁니다. “모두 예수님 앞에 나오라! 나같은 이가 용납받았듯이 이 세상에 주님에게 용납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캐오는 주님의 뒤를 따라 ‘부자’와 ‘가난한 자’들의 ‘화해’를 선포한 거죠. 부자들의 내려놓음을 통한 재분배와 공생을 선언한 겁니다. 그는 그렇게 이 사회의 모든 소외받고 거절받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해방과 구원을 선포한 거죠.


3. 성공회에서 시도하고 있는 ‘새로운 선교형 교회 운동’의 하나가 ‘길찾는교회’라고 들었습니다. ‘새로운 선교형 교회 운동’은 무엇이고, ‘길찾는교회’는 이를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나요?

새로운 선교형 교회 운동이란 건, 한때 영국의 국교이기도 했던 영국 성공회에서 20여 년 전에 시작된 운동이고요. 현재 영미권에서 주류 교회이기도 한 성공회의 자기 반성으로부터 시작된 여러 운동 가운데 하나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여러 가지 이유로 주류 교회이자 전통 교회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현대인들을 만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교회들을 세우는 운동이죠. 단순하게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추는 교회라고 쉽게 오해하실 수도 있는데, 그런 건 아니고요. ‘교회란 무엇이고, 왜 존재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으로 돌아가, 오래된 교회의 정신과 이야기를 2015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맥락에서 재구성하고 재배치하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선교형 교회 운동’에서 ‘새로운’은 단순한 ‘New’가 아니라 ‘갱신, 개혁’에 가까운 의미를 담고 있죠. 그런 점에서 길찾는교회는 '이론적인 성공회 교회가 가질 수 있는 장점을 우리들의 일상과 현실 속에서 경험해 볼 수 있도록 하자'. 그리고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없다는 전제로, 정직하게 묻고 답하는 교회가 되자'는 정도의 지향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4. 재능교육농성장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투쟁과 함께 하는 거리의 예식을 올리시던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요. 성직자로서 이 분들과 함께 거리의 예식을 올리신 이유를 말씀 부탁드립니다.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신앙 고백은 ‘하느님 앞에서 모든 존재는 평등한 존재이고, 신앙은 그 평등한 존재들이 공정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사는 것이다’라고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심각할 정도로 기울어져 있죠. 이미 심각할 정도로 기울어진 세상, 그 세상의 기울어짐 때문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 사회. 더군다나 다양한 의미의 가난함 때문에 그 고통 가운데 목소리와 몸부림조차 빼앗긴 사람들. 그 고통받는 이들을 편드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선언하는 영적, 그러니깐 신앙적이고 상징적이며 통합적인 싸움이 바로 ‘전례이자 의식’인 거죠.

그러니 7년째 자본의 부당함에 고통받고 목소리와 몸부림조차 빼앗긴 분들과 함께 기도하며 예식을 함께 하는 것. 이건 저희에게도 매우 신앙적이고 상징적인 일이자 참여인 거죠.


5. EG테크, 하이디스테크놀로지 등 최근들어 다시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잇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이 분들과 그 분들의 가족 동료들에게 무엇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수 있을까요?

그분들의 죽음을 단순하게 개인 차원의 ‘자살’이라고 해석하는 건, 그분들의 죽음에 침묵하는 것만큼이나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은 ‘사회적’으로 ‘타살’당하신 거니깐요. 왜 타살이냐고요? 그분들의 몸부림과 목소리를 뺏고, 우리 눈에 띄지 말고 저항하고, 우리 귀에 들리지 않게 싸우라고 한 게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벼랑 끝에서 싸우고 있는 수많은 노동자들을 다양한 의미에서 떠밀어 버린거죠.

그분들에게 빚진 마음으로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기지 않도록 싸우고 있는 이들이 곳곳에 있다고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6.하느님과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노동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까요?

저는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는 근대 프로테스탄트 윤리 식 해석은 유효기간이 지났다고 봅니다. 이 시대의 노동은 매우 다층적이고 복합적이죠. 그렇기에 이 시대의 노동을 조명하고 해석하는 다양한 해석틀에 대해, 사회학이나 노동 전문가 분들에게 묻고 경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이 해석의 한 꼭지를 담당할 수는 있어도, 전부를 답할 수 있다는 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동 시대의 뛰어난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면 그 답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7. 지금 우리 사회에는 차별에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소수자들도 그렇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성소수자를 위한 기도의 자리에 함께 하시고는 하는데요. 성소수자는 하느님에게 어떤 존재일까요?

간단합니다. 성소수자 또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존재들 가운데 하나이고, 성서에 기록된 것처럼 ‘보시기 좋았더라’고 그 존재 자체를 긍정하신 존재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 존재를 차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면, 하느님의 마음에 대해 얼마나 공명하고 있는 지 되묻고 싶습니다.

한때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피부색을, 장애를, 여성을 차별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서의 기록된 말씀이며, 교회의 전통이고, 사회의 순리라고 주장했었죠. 물론 2015년 대한민국에도 아직까지 그런 분들이 있긴 하지만, 대다수 교회는 더 이상 피부색을, 장애를, 여성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아니 못합니다.

왜 일까요? 교회와 기독교인들 또한 사회와 더불어 사는 존재들이기에, 사회의 변화나 진보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깨우침과 진보가 피부색이나 장애,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하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에 어긋나는 것임을 알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적 지향을 이유로 차별하고 존재를 부정하는 분들에게 사회와 교회의 역사 앞에서 배우기를 부탁드립니다. 성서와 교회 전통, 그리고 합리적 이성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느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식별하기를 요청드립니다.

그 모든 차별과 배제가, 실은 ‘불안과 공포’로부터 오는 것임을 살피기를 바랄 뿐입니다. 성서와 교회 전통은 ‘불안과 공포’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거짓된 영’이 주는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것은 ‘평화와 화해’입니다.

그러니 차별에 앞장서는 왜곡된 신앙이 아닌, 평화와 화해 그리고 차별 철폐에 앞장서는 하느님의 마음에 가까운 신앙으로 돌이키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8. 신부님께서는 얼마 전 "우리들의 신앙과 경계 안에 갇혀 있지 않으신 하느님. 우리보다 넓고 길고 높고 깊으신 하느님은 교회 안에만 갇혀 있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말 그대로입니다. 교회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보수적인 신앙의 논리로 설명해도, 교회는 한시적입니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신앙의 논리로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 이뤄지면 그 역할을 다합니다. 왜냐면 교회는, 그 다시 오심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살아있는 유기체인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오직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자 삼위일체 하느님이신 예수님께 이어져 있을 때에 온전한 유기체로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들의 하느님이 교회 때문에 존재하는 분이 아니란 겁니다. 그분 때문에 우리들의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하느님은 우리들의 교회에 갇힐 수 없는 분이십니다. 다양한 측면에서 동시대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하는 교회 안에 갇힐 수 없는 분인거죠.

우리들의 하느님은 한 교단의 신앙 고백이나 교리, 아무리 수십 만의 신자들이 모일지라도 하나의 지역 교회 그리고 목회자 한 명의 가르침 안에 갇힐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교 교단과 교회들은 우리들의 하느님을 비추는 다양하고 여러 개의 거울 파편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그것들이 서로에게 배우고 서로를 통해, 하느님의 또 다른 모습과 가르침을 깨우쳐야 합니다. 물론 그 하느님의 모습과 가르침 또한 ‘전부’가 아니라는 전제로 말입니다.


9. 그런가 하면 "그 거리의 언저리, 그 모퉁이에서 이야기와 상징을 담아 싸운다는 것에 대해 묻고 또 묻는다. 나, 그리고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일반인들과도 충분히 '공감의 연대'를 이루며 싸우는 길.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도 기억에 남습니다. 신앙과 경계의 안을 극복할 수 있는 곳이 말씀하신 ‘거리의 언저리와 모퉁이’ ‘공감의 연대’일까요?

반복적으로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우리가 다 알지 못한다’는 전제로 겸손히 살아야 합니다. 심하게 기울어진 이 세상에서 해방과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고 증언하며, 그 싸움의 한복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을 만큼 연대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살아가는 교회와 신자들이 있어야 하는 자리가 어딜까요? 교회가 베이스 캠프이고 야전병원이라는 보수적인 교회의 가르침을 수긍하더라도, 교회와 신자들은 베이스 캠프에서 야전으로, 야전병원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니 교회와 신자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복음’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야전인 일상에서 고백되고 증언되며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야전이나 일상은, 사회의 중심부로 진입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의 무한 경쟁이나 무한 질주’에 휩쓸려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중심부로 향하는 경쟁이나 질주에서 탈락하거나 비틀거리며 밀려난 사람들이 머무는 그 언저리와 모퉁이에서 만날 수 있는 겁니다.

그렇게 그 언저리와 모퉁이에서 불안과 공포의 무한 경쟁이나 질주에서 밀려난 이들 가운데에서, 그리스도교가 품고 있는 ‘하느님의 뒤집기’에 대한 이야기와 상징를 들려주고 보여주며 심하게 기울어진 상태에서 폭주하고 있는 이 세상과 사회에 숨을 쉴 틈을 내고 탈주의 발판을 만드는 것이 종교의 진정한 역할이라고 믿습니다.

 

10. "어느새 우리는, 계명, 믿음 그리고 성령의 은혜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고 지키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말씀도 기억에 남습니다. 어떤 의미가 있는 말씀인가요?

말 그대로 우리가 고백하고 증언하며 삶을 다해 따르겠다고 하는 ‘하느님’ 자체가 아니라, 그 신의 자취이자 도구에 집중하고 있는 주객 전도의 상태라는 겁니다. 신의 자취이자 도구일 뿐인, 계명이나 믿음, 그리고 성령의 임재라는 은혜에 매몰되어, 그 너머에 계신 하느님을 못 보고 있는 거죠.


11. 굉장히 추상적이지만 꼭 드리고 싶은 질문입니다. 고통받는 사람이 많은 우리 시대, 종교와 교회는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합니까?

먼저 철저한 자기 반성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와 교회가 고통받는 사람의 고통으로 장사하며 생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 지 말입니다. 그 철저한 자기 반성 위에서 고통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어가, ‘불안과 공포’ 마케팅에 정면으로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저항이, 힐링이나 자기 수긍에 머무는 긍정 심리학의 변형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또는 우리에게 일자리를 주는 자본이나 자본가의 세상이나 이를 뒤집어 버리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신의 뜻에 가깝다고 단순명료하게 해석해 버리는 게으름과 직무유기 또한 쉽게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철저한 자기 반성에 기초하여,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알 수는 없다는 겸손함으로, 종교와 그리스도교 이외의 다양한 가르침과의 유기적 협업과 논쟁을 통해,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만큼 걸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서로를 적이 아닌 나의 거울로 반면교사 삼으며 걸어가는 것. 이것이 종교와 교회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고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종교나 교회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정답이 아니라, 신에게로 안내하는 안내자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잠시 머물다가 신에게로 가는 ‘작은 우산’일 뿐임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게 중요하겠죠.


12. 신을 믿지 않거나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 길을 가야 합니까?

저 또한 제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잠깐 아는 척할 수는 있는데요 ^^  그래봤자, 각자가 기대고 있는 가르침에 의지해서 끊임 없는 자기 수행과 이타적인 덕을 쌓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안내 정도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가운데 '자비, 연대, 용기'라는 세 가지 덕목만큼은 잊지 않아야 된다는 정도는 강조하고 싶습니다.


13. 끝으로 못다한 말씀 있으시면 해주시고 인터뷰 맺겠습니다.

제가 자주 읽고 인용하는 성서 가운데, '요한의 첫째 편지 4장'의 말씀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7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19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을 합니다.
20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제게 허락된 자리에서, 제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한사람’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미 심각하게 기울어진 세상에서 여러 의미의 가난함 때문에 몸부림과 목소리마저 빼앗긴 길벗들을 편들러 오신 하느님, 그 하느님을 편들며 사는 한 명의 그리스도교 신자이자 성공회 신부일 뿐입니다.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지향은 권력이나 사회의 중심부가 아니라 언저리이고, 그 무한경쟁이나 질주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균열과 탈주의 발판이자 우산이 되어주는 공동체라는 걸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속한 성공회와 길찾는교회는 그런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뒤집기’를 들려주고 함께 싸우도록 초대하는 곳임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왜냐면 심하게 기울어진 세상에서, 종교와 교회는 순응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저항을 체득하고 전수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시작되는 하루, 우리의 한계보다 넓고 깊고 크고 높으신 하느님, 그 편드시는 하느님의 평화를 빕니다.


* 덧붙임. 하지만 실제 인터뷰에서는.. ㅎㅎㅎ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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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5/05/19 04:39 2015/05/19 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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