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를 넘어.

비 오는 소리에 깼다. 원래 계획대로 였다면, 정신 없이 바빴을 하루.

잠깐동안 문 밖에 내리는 빗줄기를 쳐다보다가, 문득 혐오와 싸우다가 영혼과 맘이 병들어 갈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전에도 글로 한 번 나눴던 것처럼, 병영 국가 또는 병영 사회와 맞서 싸우다가 어느새 '지향만 다른 또 하나의 병영 조직(공동체)'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너무 강력한 적 앞에서 이성과 마음을 잃고, 너무도 쉽게 불안과 공포의 속삭임에 넘어가기 쉽다. 그래서 '다른 세상'을 꿈꾸며 말하는 일반 운동체들은 '흔들림 없는 이성'을 자주 말하고, 종교 공동체는 '변함없는 사랑의 마음'을 자주 말하는 것이다. 내 생각과 경험에 이 둘은, 약간의 변주곡일 뿐 실상 가리키는 방향은 거의 똑같다.

엇그제 금요일. "혐오에 희생된 성소수자를 기억하는 추모 기도회"에서 급한 장례로 참여하시지 못한 임보라 목사님을 대신해, 작성하고 기도한 '여는 기도'에서 간절히 기도했던 것이 그것이다.

왜, 커다란 혐오와 싸우기 위하여 또다른 혐오의 방법을 사용하면 안 되는지를 담았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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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지금 어디 계시나이까? 주여, 지금 뭐라 말씀하고 계시나이까?

슬픔이 진동하고 눈물이 강을 이루는 이 봄 날. 수많은 사람들의 응어리진 가슴 속에서, 슬픔은 미움이 되고 미움은 저주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점점 뾰족한 가시를 곤두세운 고슴도치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마땅히 책임져야 할 사람들과 시스템은 돈과 권력을 쥐고, 끊임 없이 만만하고 새로운 '악마'를 만들어 우리 앞에 먹잇감으로 던져 주고 있습니다.

주여, 이 가운데 우리는 '혐오'를 도구화하는 거짓되고 어두운 영들을 만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에 속삭여 '악마'를 만들어 주홍글씨를 찍고 거리에 매달아 놓는 거짓된 영, 그 어두운 영을 만납니다.

이 시간 모인 우리. 만물 안에 깃드신 하느님의 숨결을 고백합니다. 그 하느님의 숨결로 살아가는 모든 생명과 존재들. 그 모든 존재들이 바로 하느님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믿습니다. 또한 우리도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용납받은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니 오늘 이 추모 기도회를 통해, 거짓되고 어두운 영들에 의해 도구화된 혐오를 넘어설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허락해 주소서. 슬픔이 분노를, 분노가 슬픔을 할퀴어 더 덧나지 않게 하소서. 더 외롭거나 미쳐가지 않게 하소서. 죽음의 향내를 맡지 않게 하소서.

도구화된 혐오에 의해 희생당한 희생자들과 남은 이들의 고통을 기억하게 하소서.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리고 우리의 힘을 모아 연대의 길을 가게 하소서.

"주여, 지금 어디 계시나이까? 지금 뭐라 말씀하고 계시나이까?"라고 묻는 우리의 질문. 이 질문에 반문하는 당신. "지금 너는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주여, 오늘 우리가 당신의 반문에 대답하게 하소서. 분노를 이기기 위해 기억하며, 슬픔을 이기기 위해 연대하게 하소서. 이 땅의 그 누구도 주님의 사랑이 아닌 우리의 기준으로 배제되거나 소외될 수 없음을 증거하게 하소서. 주님의 사랑, 그 사랑에 의지한 우리의 사랑이 혐오를 이긴다는 증인으로 살게 하소서.

사랑으로 세상 모든 혐오를 변화시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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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 기도회. 어떤 이가 부른, 그 어떤 노래가 귓가에 남아 그 노래를 싣는다.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아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 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 박기영, "아네스의 노래" (From 영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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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4/04/27 04:49 2014/04/27 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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