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올 때까지

일주일에 두 번. 더 나빠지면 시술이나 수술해야 할 지도 모르니 꼭 치료받으러 오라는 의사와 물리치료사님의 권유에 애써 시간을 조정해보려고 해도 쉽지가 않다. 그 두 번을 지키기가 어렵다.

겨우 시간을 조정해서 병원에 가면 사람들의 온갖 넋두리가 들린다. 요즘 사는 게 얼마나 팍팍한 지, 잠시라도 멈추면 넘어지는 자전거처럼 살 수 밖에 없는 일상 얘기들. 그래도 너무 힘들어 어쩔 수 없이 치료를 받으러 오는 힘겨움에 대한 얘기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대기실이나 치료 중에 계속 울리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 사연들을 듣다 보면, 누군가의 갑일 때와 을 또는 병, 정일 때의 목소리와 태도가 확연히 바뀌는 걸 느낀다. 대부분 누군가의 을이나 병, 정이고, 간혹 누군가에게 갑인 사람들인데도 그렇다.

나는 어떨까.. 학교에서 마주치는 청소 노동자 분들처럼, 하루에 두세 개씩 허드레일을 하며 나와 동생들을 키우신 엄니의 삶에 비춰 보면 나의 삶은 확연히 다르긴 하다. 일주일에 한두 번이라도 병원에 들려 치료받을 수 있는 시간과 돈이 있는 나는, 상대적으로 정보단 병이고, 병보단 을이며, 때론 을보다 갑처럼 살 수 있다.

얽히고 설킨 이 사회에서, 어느새 나는 누군가에게 갑이고 누군가에게 을이며 또 누군가에겐 병, 정이다. 성공회대 채플린이자 채플 비전임 강사이며 행정 직원 업무도 겸하는 나는, '갑, 을, 병, 정'의 삶을 수시로 체험한다.

물론 이 사회 구조에서 나는 상대적으로 나은 쪽에 속해 있다. 실상 위태롭게 버티는 매일일지라도, 그마저도 없는 사람들에 비해 많은 걸 누리고 있는 쪽이다.

헌데 이런 나도 일주일에 두 번의 치료 시간과 병원비가 버겹다. 결국, 모두를 깔때기 상황으로 몰아 넣고 정에서 병으로, 병에서 을로, 을에서 갑이 되어 사는 것만이 '생존 법칙'이 되도록 하는 사회에선, 누구에게도 진정한 희망은 없다. 일부 '갑'조차도 그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인간됨'을 유보하고 살아야 하니 말이다.

더 나은 삶이란 갑과 을이 뒤집어지는 걸 넘어, 모두가 인간됨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이지 않을까 싶다. '하느님의 선교'에서 말하는 '참세상, 참인간'이란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닐까. 갑과 을이 갑질이나 을노릇을 하지 않아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그 세상이 올 때까지 갑과의 싸움은 그들과 우리의 '인간됨'을 되찾기 위한 진지하고 정의로운 투쟁임을 잊어선 안 된다.

병원 다니다가 별 생각 다한다 싶은데.. 별 생각하게 할 수 밖에 없게 하는 세상이니 별 수 있나 싶다 ㅎㅎㅎ

* 덧붙임: 저 입원한 거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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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4/11/14 04:36 2014/11/14 0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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