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4주일, 성탄맞이 연합예배: 4개의 초를 밝히며”

* 2014년 12월 21일, 섬돌향린교회와 길찾는교회의 연합예배 설교.

* 1독서, 사무하 7:1-11 / 2독서, 로마 16:25-27 / 복음, 루가 1:26-38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성서정과(Lectionary) 또는 성서일과(聖書日課)는, 그리스도교에서 교회력에 따라 배치한 성서 읽기 표를 뜻합니다. 제가 알기로 섬돌향린교회가 속한 기독교장로회나 길찾는교회가 속한 성공회 모두, 세계교회 가운데 주로 영어권 교회들이 사용하는 ‘개정공동성서정과’(RCL)를 따릅니다.

이 성서정과에 따라, 대림4주일 복음 말씀은 “거룩한 아기”에 대한 성모 마리아와 천사 가브리엘의 대화가 주내용입니다. 거룩함에 대한 선언과 응답, 또는 거룩함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스러움'이라고도 바꿀 수 있는 거룩함이란 무엇일까요? 교회마다 거룩함에 대한 가르침은 다릅니다. 그 모두를 다 말할 수는 없으니, 저는 오늘 제가 속한 '전례적 교회'의 관점에서 그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전례적 교회, 그러니깐 첫 교회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오래된 ‘교회의 이야기’를 소중하게 간직하며 전하고, 시대에 발맞추어 갱신하며 살아가는 교회들을 ‘전례적 교회’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전례적 교회에서는 성스러움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이미 우리 안팎에 충만하게 존재하는 하느님의 기운, 또는 하느님의 숨결.”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이미 성스러운 존재들, 다시 말해서 ‘거룩한 존재들’입니다.

하느님의 기운 또는 하느님의 숨결을 품은 존재들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하느님의 숨결을 품은 존재들임을 각성하고 자각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성령 하느님을 통해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를 품은 사람들입니다. ‘잊었던 나’를 찾은 존재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란 것이죠.

이처럼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엄한 존재이며, 이를 각성하고 자각하며 사는 존재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룩함’, 다시 말해서 ‘성스러움’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증언을 통해 만나게 되는 거룩함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아니, 많이 다릅니다. 왜냐면 '부정하다고 여겨진 존재들이 잉태한 거룩함'이기 때문입니다.

정교회 신학자 알렉산더 슈메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온 세상은 하느님의 제단, 성전, 하느님나라의 상징으로 창조”되었다고요. 그렇기에 공동체에서 직무사제로 식별된 저와 같은 사람은 물론, 이 세상을 위한 보편사제로 부름받은 우리 모두가 행하는 ‘축성’이나 ‘축복’은 그 성스러운 것들이 지닌 "원래적이며 궁극적인 의미를 지시하는(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건, 속(俗)과 성(聖)이 나뉘어져 있어서, 우리들이 축성하거나 축복하는 순간에 속된 것이 성스러워지는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속과 성은 원래부터 하나에 가까워서, 우리가 속되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 안팎에 있는 “원래적이며 궁극적인 의미를 드러”낸다고 봅니다.

이러한 이해의 원천은 바로 성서입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들의 하느님’이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알려주신 ‘성육신’, 즉 ‘인카네이션’(Incarnation)이 중요한 근거입니다. 우리가 속되다고 여기는 우리 삶 가운데 가장 성스러운 ‘우리들의 하느님’이 임하신 겁니다. 우리들의 생사화복(生死禍福)과 희노애락(喜怒哀樂), 그리고 뼈와 살을 있는 그대로 받아 안고 이 땅에 오신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건, 고대 교회에 의해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받은 성모 마리아를 통한 성육신입니다. 오늘 우리가 연합예배를 시작하며 함께 부른 ‘마리아의 노래’는, 루가의 복음서 1장에 나와 있습니다. 이 노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매우 중요한 하나의 좌표이며, 성탄을 앞둔 대림4주일에 성탄의 의미에 대해 알려주는 중요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건 바로 ‘부정된 자들의 삶이 품은 거룩함’으로 ‘해방과 구원 그리고 증언’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와 각자의 삶, 즉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를 증언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증언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이야기를 확인합니다. 우리들의 하느님은 중심부인 예루살렘에서 약 90km 떨어진 갈릴래아 나자렛이란 시골에 사는, 작고 연약한 여인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놀라운 건, 이 작고 연약한 시골 여인의 고백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찾아와 몹시 당황한 이 여인이, 천사와의 대화 끝에 이렇게 답합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으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예배드리며 불렀던 노래. “마니피캇"(Magnificat). 성모 마리아 송가. 이 마리아의 노래는, 마리아를 통해 이뤄질 말씀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줍니다.

스스로 비천한 자라고 칭하는 마리아. 전능하고 거룩하신 하느님이 이루실 “큰일”에 비해 ‘작은 자’라고 고백하는 마리아. 우리들의 하느님은, 시골 나자렛에서 사는 작고 연약한 여인 마리아의 몸을 통해 ‘아기 예수’가 되어 길바닥 옆 구유로 오셨습니다.

유대사회에서 ‘작은 자’이자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부정당한 자'인 미혼모 마리아. 초기의 역동성을 잃고 점점 권력을 가진 남성 중심으로 재편되던 초기 그리스도교에도 불편한 존재이었던 성모 마리아.

그럼에도 성모 마리아는 고대 교회에 의해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불렸습니다. 아무리 교회 전통이 왜곡되고 삭제되어도, 성서와 교회의 전통과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우리에게 증언되며 전해졌습니다. 우리들의 하느님께서 ‘이 땅의 작은 자들’을 위해 ‘작은 자들’을 통해서 오셨다는 것말입니다.

여기서 제가 참 좋아하는 선배이자 길찾는교회의 좋은 길벗인 주낙현 신부님이 성.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를 통해 얻은 통찰을 잠시 빌려 보겠습니다.

중세교회는 고대교회가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불렀던 것을 과잉해석했습니다. 나중에는 성모 마리아가 승천하셨다고까지 했습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교회들은 ‘성모 마리아’를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고대교회가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불렸을 때에 중요한 초점은 그녀가 ‘동정녀’라는 사실이나 다른 종교가 가지고 있던 ‘신의 어머니’라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생명을 낳을 수 있는 상태의 ‘동정녀’라는 사실이었고, 그 생명을 양육하는 ‘어머니’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은, 우리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거룩한 부르심’, 즉 성소에 응답한 자들이라면 우리 모두가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습니다. 성.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우리 모두는 마리아께서 그 몸을 통해 낳은 이를 우리 안에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라 부르는 분을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하느님을 품은 자들’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이자 하느님을 품은 자들’로 새로운 이들을 하느님께로 초대해서, 그들 또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도록 안내하고 동행하는 이들이 됩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어 ‘마리아의 노래’가 교회와 우리 각자의 노래가 되도록 사는 이들이 됩니다.

우리들의 하느님은 우리들의 비천함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비천함과 뒤섞여 빛을 잃고 보이지 않던 우리들의 거룩함, 그 성스러움을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복된 큰일을 하게 하시어, 우리들을 통해 하느님의 거룩함을 우리 이웃과 온 세상에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들의 하느님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우리들을 통해 증언하십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구원의 자비를 베푸십니다. 당신의 전능하신 팔로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십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칠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하느님으로 섬기는 모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십니다. 굶주린 사람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 보내실 것입니다.

이를 기억하고 증언하며 행하는 하느님의 종 이스라엘. ‘하느님과 씨름한 자’, 다시 말해서 ‘하느님과 대면한 자’라는 이름 뜻을 가진 이스라엘을 향한 자비를 기억하시며 도우실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우리 각자가 이 땅의 ‘성모 마리아’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제가 속한 길찾는교회가 ‘성소수자 길벗들’을 비롯한 다양한 ‘소수자’들과 함께 하길 원하는 건, 저를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나 ‘하느님의 숨결을 품은 자들’이 소수자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전례적 교회라고 부르는 교회는, 기본적으로 ‘가톨릭’(catholic, 보편적)이란 개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가톨릭, 보편적이란 말은 ‘획일성’을 말한다고 오해되기 쉽습니다. 특히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교회 신학이 강조되는 교회 입장에서 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고대 교회에서 ‘가톨릭’ 즉 보편성이란 개념은, ‘이어져 있다’에 더 가까운 개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 또는 우리 각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라는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기로 결정한 순간, 우리는 ‘소수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모 마리아처럼 시대와 사회의 소수자, 다시 말해서 '부정당한 자'가 되고, 그 부정당한 자들과 '이어진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감춰진 욕망으로 들끓는, 이 시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힘과 돈’을 움켜쥔 ‘다수’나 ‘주류’가 되는 일에 그리스도를 이용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하느님은 그런 일에 결코 자신을 내어주지 않으십니다.

물론 이 사회가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흘러 넘치는 곳이라면 다수나 주류가 되어도 좋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마땅히 소수자가 되어 저항자이자 예언자이며 증언자로 존재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의 예언자이자, 하느님의 길을 안내하고 드러내는 증언자이며, 정의와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할까요? 교회력으로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는 대림절기는, 우리가 특별히 이를 고민하고 성찰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주께서, 스스로를 비천하다고 여긴 시골 여인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오신 우리들의 주께서, 2014년 성탄절에는 어디로 오실까?’

저는 믿습니다. 우리들의 하느님, 작은 자들을 통해 이 땅에 오신 우리들의 주께서는, 이 시대와 사회의 가장 ‘연약한 고리’인 ‘모두에게 주어진 인권을 부정당하는 성소수자’와 ‘일하는 모든 이들의 마땅한 권리인 노동권을 부정당하는 노동자들’이 있는 곳으로 오실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들의 하느님은, 마리아라는 그 시대와 사회에 의해 ‘부정당한 자’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며 살려면, 우리 스스로가 그리스도인이란 자각 속에 살려면, 우리 존재가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를 증언하고 증거하는 예언자로 살아야 합니다. 성모 마리아가 그러했듯이,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전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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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임. 섬돌향린교회와 길찾는교회의 연합예배. 오랜만에 설교를 준비했으나, 결국 많은 걸 배운 시간이 되었다. 역시 설교 또한 맥락과 흐름 안에 있어야 힘이 나고 편안해진다. 상황에 맞추느라고 스스로 힘겨운 설교는 그 누구에게도 가닿지 못한다. 닿지 못하니 아무 공명도 없다.

꼼꼼히 준비하고 또 다양하게 검토했어야 했는데, 지난 몇 번의 경험에 지나치게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 내 한계다. 이번 배움으로 다시 또 한걸음 성장할 수 있었으면 한다. 준비도 부족했고 욕심도 과했으니 힘이 들어가도 너무 들어갔다. ‘가난한 마음’이 아닌 ‘아는 것’으로 나누려고 했으니, 아직도 내려놔야 할 것이 너무 많고 가야할 길이 너무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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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4/12/23 13:08 2014/12/23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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