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로운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이 참 많다.

그 중에서도 소위 '성직자'라 불리는 사람들 가운데 외로운 사람들이 많다.


물론 사람들의 삶이 저마다 결이 달라서 쉽게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긴 하다. 하지만 경험하는 사건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

헌데 성직자라 불리는 사람들은 '같은 사건'을 경험해도 '다르게 반응'하기를 기대받는 경우가 많다. 일면 그런 기대가 틀린 것 같지 않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똑같다면 그들을 '다르게' 부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또 한편 성직자라 불리는 사람들이 경험한 것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의 내밀한 부분에 대한 것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누구와 쉽게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지 못한다.

정신 건강을 위해 쌓아두지 말고 표현하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의 내밀한 부분에 얽힌 이야기는 쉽게 표현하지 못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지에 대해서도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그래서 왜곡되게 표현되는 경우가 참 많다. 이건 나라고 벗어날 수 없는 한계다.

설교나 공부 인도 또는 강의 가운데 갑툭튀되거나 의도를 가지고 행간에 섞여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니면 비슷한 환경에 있는 성직자들끼리 모여 뒷담화하듯이 흘려 버린다.

헌데 이 모두 '어쩔 수 없는 왜곡'을 넘어서는 경우가 많다. '성찰과 식별'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러니 많은 경우에 상처와 후폭풍이 따라 다닌다. 그리고 성직자라 불리는 사람들은 점점 더 자기 속으로 숨어 버린다.


# 공포, 불안 그리고 유배


나를 포함해 성직자라 불리는 사람들은 '공포와 불안'에 쉽게 사로 잡힌다. 작은 공동체에 속한 성직자일수록 더 쉽게 사로 잡힌다. 작은 공동체일수록 평가와 피드백이 매우 쉽게 전달되고 즉각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다보니 본능적으로 공포와 불안을 활용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당연히 이를 이겨내기 위한 온갖 방법들이 동원되기도 한다.


얼마 전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

"정규직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비정규직과 알바로 살 때에 가장 힘든 게 뭔지 아느냐?"

자신의 의지나 능력과는 상관 없이 다른 맥락에 있는 일을 해야 하는 것. 그 과정에서 소모품처럼 여겨지는 거란다.

이 과정에서 공포와 불안이 다양한 코드로 변환되어 사람들을 지배한단다. 때로는 유머로, 때로는 다양한 폭력으로, 때로는 경제적 압력으로, 때로는 위계로.

이 '공포와 불안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가진 사람들'은 점점 더 외로워진다. 그들의 말투와 말의 내용 그리고 행동에서 어른거리는 공포와 불안 메시지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를 알고 활용하거나 피해가고자 처마 밑으로 들어가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곁에 있는 사람들이 '애정 어린 관계'를 형성하겠는가? 외로움은 점점 더 커질 뿐이다.

이 공포와 불안 메시지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주변 사람들'도 점점 외로워지긴 마찬가지다. 말 그대로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심정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삶의 순간 순간이 '러시안 룰렛' 중이거나 "누가 밀었어!"인 경우가 많아진다.


결국 공포와 불안 메시지의 영향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나 영향권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모두 점점 '유배'되어 간다. 안전한 거리에서 '힘의 관계'가 아닌 '상호 존중과 식별'을 가능하게 하는 '가능성'에서 점점 유배되어진다.


# 넘쳐나는 것들


그러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직자라 불리는 사람이라면 이 공포와 불안 메시지와 싸워가야 한다. 싸움의 방식은 다양할 수 있겠으나, 그 목표는 같을 수밖에 없다.

이 공포와 불안 메시지가 당연한듯이 자리 잡은 공동체는 어떤 가치와 구조로 포장되어 있더라도 끊임 없이 사람들을 유배시키고 외롭게 하는 작동 원리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치에서 진보이든 보수이든, 구조에서 개방적이든 폐쇄적이든 상관 없다.

공포와 불안 메시지가 횡행하는 공동체는 서로를 서로에게서 '유배'시켜 외롭게 만든다. 외롭게 된 사람들은 '중독'에 쉽게 노출되거나 '무기력'을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십상이다.

이런 공동체일수록 '일 중독'에 빠진 사람들이 많아 진다. '아이와 가족'을 생각(?)하라는 말도 흔하게 오고 간다. '나의 태도'를 바꾸면 된다는 '얕은 단계의 심리적 처방'도 넘쳐 난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들이 답일까? 우리 주님께서 서로를 서로에게서 유배시키는 공포와 불안 메시지로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통제하거나 지배했던가?

나의 하루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또다른 누군가를 공포와 불안 메시지로 조종하고픈 욕망은 없는가..


# 침묵과 침잠


앞으로 두세 달, '침묵과 침잠'으로 들어갈 것이다.

길벗들과 어울려 사는 삶에 집중할 것이다.

기대와 희망이 있어야 말도 하고 일도 하며 도전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도전에 대한 응답과 일정한 변화만이 우리를 새롭게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새로운 것들과 통제되지 않는 관계와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이러한 공동체와 사람은 그냥 '과거' 속에서 살면 된다. 이를 옳다 그르다 할 생각이 내겐 없다.

다만 나는 '새롭게 하는 길'로 떠나려고 한다. 지금 그 길이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길이라고 응답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내게는 어느 정도 '안전한 공간'이 필요할 뿐이다.


# 외롭게 유배되지 않으려면.. 첫 번째 메모


'수긍'과 '침묵'은 비슷해 보이며, '상하'와 '상호'는 한 끝 차이다.

결국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힘'이 아니라 '애정'인데,

'애정'에 기반한 관계만이 '이해'와 '수긍'을 주고 받는 '상호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기대하는 것이 적으면 실망도 적다는 말과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는 말들이 주는 의미에 대해 침잠해야 할 시기다.

어제 오늘, 날씨 참 좋다.


# 외롭게 유배되지 않으려면.. 두 번째 메모


같은 얘기도 반복해서 듣게 되면 속뜻을 고민하게 된다.

같은 얘기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른 뉘앙스가 된다.

때로 정직한 대화는 정직한 화와 사과에서 시작된다.

이를 구별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신자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나는 '성공회 사제'라고 불리는 사람이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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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3/10/12 03:40 2013/10/12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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