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되는 사랑으로 미움을 이기도록 이 땅에 남겨진 사람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교회는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셨다는 ‘부활 신앙’에 근거해 세워지고 유지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공동체 안팎에서 다양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시는 ‘신화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니 부활이나 승천 등을 말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실패자가 아니라 승리한 자들에게 속한 이야기였습니다. 부활이나 승천 같은 이야기는 ‘지배자’에게 우선적으로 적용되는 이야기라는 거죠.

그러니 십자가의 죽음을 끝으로 “하느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만 자신을 드러내던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부활은 당시 사람들에게 ‘변명이나 핑계’로 이해되기 쉬웠습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당시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을 겁니다.

‘너희가 믿는다는 부활하여 승천한 예수 그리스도. 그는 이 땅에서 너희를 지켜주는 어떤 권세나 힘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니 실제로는 너희를 버린 게 아닌가?’

그러다 보니,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있었을 겁니다.

‘왜 우리는 우리를 미워하는 고통스러운 이 땅에 남겨졌는가? 부활하여 승천하신 주님은 이 땅에 남겨진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안팎으로 들려오는 이런 질문에 대해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어떤 식으로든 답을 찾아야만 했을 겁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빌려 성서에 그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담아냅니다.

우리, 오늘 복음 말씀인 요한의 복음서 17장 10절부터 11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나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며 아버지의 것은 다 나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로 말미암아 내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지만 이 사람들은 세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교회는 부활하여 승천하신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가 그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을 돌보고 이끌어 온 하느님과 한 분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야훼 하느님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들이 고백해 온 신앙과 경험한 역사 가운데 자신들을 돌보고 이끌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생각은 이후 교회에서 지도자 역할을 감당한 교부들의 가르침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스승 가운데 한 명의 이름을 빌린 위-아타나시우스의 글을 함께 읽어봅시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약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나약함을 취하시고, 배고프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배고픔을 취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것을 올려 보내시어 그것이 완전히 없어지도록 하십니다. 그분은 그렇게 하시는 한편 그와 똑같은 식으로, 당신과 하나된 우리가 나누어 받을 수 있도록 우리의 나약함 대신 하느님에게서 오는 선물들을 받기도 하십니다.”
- 위-아타나시우스 <아리우스파 반박 넷째 연설> 7.,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Ⅵ>, 361쪽.

이처럼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고통을 하느님께 올려 보내어 없앴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은총의 선물을 우리에게 나눠주는 ‘중요한 통로’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시고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건, 이 땅에서 고통 받는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상징적 고백이었습니다.

부활하고 승천하시어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신 분만이 우리의 고통을 하느님께 보내어 없앨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만이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의 선물을 받아 우리가 곧바로 나눠받도록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교회는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고백하고 기록하여 전했습니다.

또한 이런 신앙 고백은 오직 자신들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만이 할 수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이런 신앙 고백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 건, 그처럼 부활하고 승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스승인 오리게네스가 들려주는 가르침을 함께 읽어 봅시다.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 때문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2코린 4:18)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우리를 미워했습니다.”
- 오리게네스 <마태오 복음 주해> 13,20.,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Ⅵ>, 375쪽.

교회의 스승인 오리게네스도 강조하듯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처럼 살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이 땅이 아닌 저 너머 어딘가에 있는 천국을 소망하며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건 이 땅에서도 ‘다른 관점’으로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분명히 이 땅에 발 딛고 살지만 이 땅의 규칙에 사로잡히거나 얽히지 말라는 뜻이죠.

그런 것들에 사로잡히거나 얽매여 사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그 너머에 있는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바라보며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사로잡히거나 얽매여 사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우리 함께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가르침을 읽어 봅시다.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씀이 뜻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일치와 화합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로써 하나가 많은 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둘이나 열이 한마음일 때, 하나는 더 이상 하나가 아닙니다. 하나하나가 열 배로 늘어나고, 여러분은 열 안에서 하나를, 하나 안에서 열을 발견하게 됩니다 ... 하나를 천으로 만드는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 증식자인지 보십시오.”
-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요한 복음 주해> 78,3-4.,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Ⅵ>, 370쪽.

이 땅에 사로잡히거나 얽매여 사는 사람들이 볼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하나 되는 일치와 화합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교회는 초기로부터 지금까지 그 일치와 화합을 상징하는 게 바로 ‘성찬 참여와 나눔’이라고 가르쳐왔습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고 나누는 과정에서 “열 안에서 하나를, 하나 안에서 열을 발견”하고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 되는 사랑’을 계속 경험하고 확장하는 존재가 되어, 이 땅에 사로잡히거나 얽매여 사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미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힘과 사랑에 속한 사람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이 동 시대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를 삶으로 증언하고 보여주도록 이 땅에 남겨진 사람들이 됩니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이 땅에 버려진 게 아니라, 증언하고 전하는 존재로 이 땅에 남겨진 겁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함께 할 성찬 참여와 나눔은 ‘즐거운 사랑의 식탁’이면서 우리를 ‘하나 되는 사랑과 힘’으로 이끄는 중요한 통로임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고 나눌 때마다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보내어져 부활하고 승천한 하느님의 통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또 다른 방식으로 만나게 됨을 기억합시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 되는 사랑으로 이 땅에 가득한 미움을 이기도록 이 곳에 남겨진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놀라운 은총의 선물이자 통로는, 오늘 이 곳에서 성찬에 참여하고 나누는 우리를 통해 또 다시 이 세계에 증언되고 드러납니다.

바로 이 곳에 있는 당신과 나를 통해 그런 놀라운 일이 계속됨을 기억하며 살아갑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멘.

*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복되신 성자 예수께서는 하늘 높이 승천하시고 만물을 다스리시나이다. 비오니,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굳세게 하시어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1독서, 사도 1:15-17, 21-26 / 2독서, 1요한 5:9-13 / 복음, 요한 17:6-19

* 2018년 5월 13일, 부활 7주일(Seventh Sunday of E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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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8/05/15 03:16 2018/05/15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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