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정화라는 이야기. 질투하시는 하느님과 그의 아드님. 참된 영성의 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오늘 복음서 본문은 우리에게 ‘성전 정화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항상 갸우뚱거리게 되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함께 요한의 복음서 2장 14~15절을 읽어 봅시다.

“그리고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환금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쫓아내시고 환금상들의 돈을 쏟아버리며 그 상을 둘러엎으셨다. 그리고 비둘기 장수들에게 "이것들을 거두어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꾸짖으셨다.”

이 부분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뛰어다니며 모든 장사꾼들과 환금상들을 쫓아내는 장면입니다.

이 사건이 실제 일어났던 일이라고 하면, 예수께서는 그 큰 예루살렘 성전을 홀로 뛰어다니며 채찍을 휘둘러 장사꾼들의 양과 소는 물론 환금상들을 쫓아냈습니다.

그들의 돈을 쏟아버리고 상을 둘러엎으셨죠. 그리고 상대적으로 가난한 장사꾼들인 비둘기 장수들에게는 그들의 장사 밑천을 거두어가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제가 궁금했던 건, ‘그 큰 성전 앞뜰을 예수께서 뛰어다니는 동안에 그 많은 제자들은 뭘 하고 있었는가?’이었습니다.

성서에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의 머리에는 '하느님이시여,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내 열정이 나를 불사르리이다.' 하신 성서의 말씀이 떠올랐다.”(요한 2:17)

시편 69편을 인용한 이 부분은 예수님의 행동이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아끼는 열정으로 반쯤 미쳐버린 듯한 것으로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행동은 아마도 예언자의 기이한 행동으로 이해되었기에 주춤거리며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 전반에서 하느님의 마음과 메시지를 전하는 예언자들의 기이한 행동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이한 행동은 일반인들이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궁금한 건, ‘예수께서 채찍을 휘둘러 장사꾼들의 양과 소를 쫓고 환금상들의 돈과 상을 엎는데, 그 많은 상인과 환금상들은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을까?’이었습니다.

짐작컨대 몇몇은 예수님의 거친 기세에 눌려 먼저 짐을 싸서 도망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성전 정화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면, 성전 뜰까지 들어와 장사할 정도로 배경이 있는 상인과 환금상들이었을 텐데, 그들이 그냥 당하고만 있었던 걸까요?

오늘 복음서 본문에는 저의 이런 궁금함을 풀어주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때에 유다인들이 나서서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데, 당신에게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도대체 무슨 기적을 보여주겠소?" 하고 예수께 대들었다.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고 대답하셨다.”(요한 2:18-19)

예수께서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내쫓고 뒤엎자 그곳에 있던 유다인들이 나서서 예수를 제지하고 대듭니다. “당신에게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도대체 무슨 기적을 보여주겠소?”

요즘 말로 ‘네 까짓 게 뭔데, 어디서 네 주제도 모르고 행패냐?’고 따졌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이 대단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이 말을 들은 유다인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예수의 과격한 행동에 대해 지적했는데,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이고 과격한 일인 “이 성전을 허물어라.”는 예수의 답변은 당시 유다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그러자 유다인들은 흥분하며 예수께 대듭니다.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육 년이나 걸렸는데, 그래 당신은 그것을 사흘이면 다시 세우겠단 말이오?”(요한 2:20)

이에 대해 성서는 다음과 같이 첨언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뒤에야 이 말씀을 생각하고 비로소 성서의 말씀과 예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21)

다시 말하자면, 유다인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이 서로 달랐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 이후 이 사건에 다시 떠올리고 성서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이뤄졌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첨언인 겁니다.

그렇게 이 사건에 대한 요한의 복음서 기록은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다른 복음서는 어떻게 이 사건을 전하고 있는 지 찾아보면, 당황스러운 일이 생깁니다.

우리에게 성전 정화 사건이라고 전해진 이야기에 대한 복음서 기록이 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 전후에 대한 기록 또한 꽤 다릅니다. 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이쯤에서 교회의 스승 중 한 명인 오리게네스의 해설을 함께 읽어볼까 합니다.

“네 복음사가는 ... 예수님께서 놀랍고 예기치 못한 힘으로 행하시고 말씀하신 많은 것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들은 어떤 곳에서는 자신들이 순수하게 지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들을 오감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성경에 엮어 넣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과 관련해서, 신비적 목적에 유용하다는 판단 아래 세부적 내용을 그들이 조금씩 고쳐 쓴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뭐라 하고 싶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들이 어떤 장소에서 일어난 일을 다른 장소에서 일어난 것처럼 또는 이때 일어난 일을 다른 때 일어난 것처럼 들려주곤 합니다. 또한 일이 일어난 과정을 조금씩 달리 기록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의도는 하나의 진실을 영적으로, 그리고 가능하다면 물질적으로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방법으로 다 말할 수 없는 경우에는 물질적인 방법보다 영적인 방법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 오리게네스 <요한 복음 주해> 10,3-4.10.18-20.,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Ⅴ>, 197-198쪽.

오리게네스의 해설은 한 마디로, 성서에 기록된 사건들이 요즘 보수 교회에서 강조하듯이 ‘문자 그대로 온전히 역사적 사실이고 어떤 의도도 없는 사실적 기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서에 기록된 이야기들은 강조하여 전하고 싶은 세부적인 내용이 있어서 조금씩 고쳐 써지기도 했고, 심지어 편집되거나 영적인 관점으로 선택되어 쓰인 부분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전 정화 사건에 대한 요한의 복음서 기록도 ‘이야기하고 싶은 무엇’이 분명하게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의 복음서가 기록하여 전하는 성전 정화 사건이 강조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건 무엇일까요? 우리, 교회의 스승인 오리게네스의 해설을 좀 더 들어봅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각자 안에 있는 하느님의 집에 몹시 마음을 쓰셨습니다. 그분은 이 집이 장사하는 집이 되거나, 기도의 집이 도둑 소굴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질투하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영혼, 특히 지극히 거룩한 신앙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이들의 영혼은 당신의 뜻에 맞지 않는 어떠한 것과도 섞이지 않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 오리게네스 <요한 복음 주해> 10,221.,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Ⅴ>, 201쪽.

그의 해설을 가져오면, 오늘 성전 정화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든 아니든 다른 사건을 각색하거나 비슷한 여러 사건을 재구성했든 중요한 건 따로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 특히 거룩한 신앙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영혼이 “장사하는 집이 되거나, 도둑 소굴”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게 오늘 복음서 말씀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하느님이 머무는 집이기에 다른 어떤 것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주인이 뒤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하느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출애 20:2-5)

그러므로 하느님과 동행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다른 무엇을 신으로 섬겨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십계명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자 정신입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그런 의미에서 십계명의 가르침과 이어져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그렇게 우리 가운데 계속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선택에 열려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실은 자신의 영혼을 담보로 끊임없이 선택을 유보한 채 계속 모으고 쌓는 일에만 집중하다가 한 번도 제대로 된 선택을 해보지도 못하고 끝나는 게 현대인들의 삶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 기도하는 집이란 건, 바로 그 부분을 짚어주고 있습니다. 기도라는 건, 우리를 비춰볼 수 있는 영혼의 거울이자 대화와 교감의 상대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을 담보로 계속 모으고 쌓는 일에 집중하다가 영혼마저 잃어버리는 잘못을 범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눈에 어리석어 보이고 약해 보이나, 실은 그보다 지혜롭고 강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지혜로운 선택을 하십시오(1고린 1:25).

그 선택은 날마다 우리의 영혼을 물들이는 온갖 잡다한 것들과 맞서 싸워 그것들을 쫓아내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영혼이 날마다 닮아갈, 그렇게 물들어갈 참된 길이자 모델인 ‘사람이 되신 하느님’ 예수님의 길을 쫓으며 동행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영혼 안에 담긴 ‘참사람’을 알아차리고 깨달아가며, 그 ‘참사람으로 오신 하느님’과 날마다 새롭게 동행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질투하시는 하느님과 그의 아들인 예수께서 우리에게 선물하신 ‘영성의 길’입니다.

우리 영혼의 판단을 흐리는 온갖 잡다한 것들을 물리치고, 우리 영혼 안에 담긴 ‘참사람’과 우리 이웃의 영혼 안에 담긴 ‘참사람’을 이어주는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의 이웃, 지금 바로 여기에 함께하는 사람들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알아차리고 동행하는 게 참된 영성의 길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잠시 묵상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멘.

* 본기도
살아계신 하느님, 성령으로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의 계명을 새겨주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를 따라 헛된 욕심을 버리고, 살아 있는 하느님의 성전으로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1독서, 출애 20:1-17 / 2독서, 1고린 1:18-25 / 복음, 요한 2:13-22

* 2018년 3월 4일, 사순 3주일(Third Sunday in L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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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8/03/05 04:35 2018/03/05 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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