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번데기와 발롯.

나는 74년생이다. 이제 30대 초반에 들어선 나에게는 추억의 군것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번데기"이다. 얼마 전 한 기사에서 한 외국인이 쓴 글의 한 부분을 인용한 것처럼, 동아시아의 훌륭한 기적의 음식이자 최고의 영양식인 번데기!

그런데, 번데기에 대한 나의 아련한 추억이,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던 사건이 하나 있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아직 한국말도 서툰 조카와의 동행 길에서, 길가에서 파는 번데기를 만났을 때이다. 그 번데기 행상을 반기는 나의 반응에 놀라며, 무슨 음식이냐고 묻는 조카의 질문에 어렵사리 대답을 해주었는데 뜨악하는 조카의 반응….

그 순간 나의 뇌리를 스치는 사건 하나가 있었다. 필리핀에 갔을 때, 발롯 Balut이라는 필리핀의 평범한 이들의 군것질거리를 받았을 때의 나의 반응. 필리핀어로 발롯이라 부르는 그것은 부화 직전의 오리 알을 삶은 것인데, 최고의 영양식이라고 추천하는 현지인 가이드의 따스한(?) 배려 앞에서 그냥 부들부들 떨었던 내가 떠오른 것이다.

번데기와 발롯. 둘 다 동아시아인들인 우리들의 환경적/문화적 배경 아래에서 선택한 영양식일 뿐인데, 나는 발롯이라는 그네들의 선택에 부들부들했으면서도 번데기에 뜨악하는 조카의 반응에는 의아한 시선을 보냈었던 것이다.

그처럼 우리가 다양한 배경 아래에서 겪는 많은 경험들이 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익숙함과 불편함으로 정리가 되고, 그중에서도 익숙한 경험은 이후에 좋은 추억이 되기도 하고 편견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익숙함과 불편함이라는 것이, 때로 우리의 진일보를 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익숙함과 불편함.

나는 태어나서 스무 살까지, 한국의 길거리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장로교회라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공동체1)에서 그 신앙공동체의 "신앙의 유산"을 이어받았다. 그러다가 그 신앙공동체의 독선적인 권위주의와 비역동적인 가르침과 모습에, 스무 살이 되던 해에 그 공동체를 떠나게 되었고, 이후 현대 오순절 운동에 있어서 나름대로의 헌신을 했다고 강조하는 하나님의교회와 하나님의성회(순복음)라는 신앙공동체에서 10년을 성도와 신학도와 전도사로서 자랐다.

그런데 그렇게 10년이 좀 넘으니, 그 신앙공동체도 서서히 화석화되어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전의 신앙공동체들의 독선적인 권위주의와 비역동적인 가르침과 모습에 반대하는 신앙운동을 지향했던 초기정신을 잃어갔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위의 두 신앙공동체가 강조하는 흐름이 아닌 다른 신앙유산의 흐름을 간직하고 있는 신앙공동체를 찾아 현재는 성공회라는 신앙공동체에 머물러 있다.

한편, 그렇게 보수적인 신앙공동체에서 자라면서도 고등학교 때에는 전교조 투쟁에 동참하는 학생이자 해방신학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선배의 후배로서, 청년의 때에는 이 땅의 사회와 신앙공동체에 대해 그 근본과 주류적 가르침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지는 사람으로서 자라왔다.

사람이 모이는 공동체이면 어느 곳이나 오래전부터 그 공동체를 지켜왔고 가꿔왔던 구성원들이 있고, 나처럼 나그네처럼 어느 시점에 들어와서는 언저리에 자리를 잡는 구성원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두 구성원 집단은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와 서로에 대한 다른 관점과 요청들을 하게 된다. 그 가운데 나라는 사람은, 언저리의 시선을 지닌, 그렇지만 내가 속한 신앙공동체에 대한 좀더 다양하고 정제된 정보를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교육받은 신학도이자 현장 활동가로 인도받아온 것이다.

그런 나이기에 익숙함이란 나에게 그리 편안한 단어가 아니다. 내게는 익숙함보다는 중앙이든 언저리이든,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익숙한 것들에 대해 불편함을 선사하는 시선과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 오히려 어울리기 때문이다.


3. 급진적 Radical, 좌파 Left, 그리고 성령운동 Holy Spirit Movement.

나는 가난하다2).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가난하고, 내가 속해있는 공동체의 기준으로 봤을 때도 언저리에 위치하고 있는 나는 가난하다. 그런 내게 급진적인 질문은, 곧 근본적인 질문이다3). 그것은 생존의 질문이기 때문이고, 내 생존의 문제를 위협하거나 억압하는 이들이 할 수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선택할 수 없는 길인 좌파4)로서의 길은, 좀더 온건하게 걷느냐 아니면 과격하게 걷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인 내가 선택해야 할 길이다. 그래서일까? 나라는 사람은 방법에 있어서 온건과 과격만 다를 뿐, 늘 긴장을 가져오는 말썽꾸러기 troublemaker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말썽꾸러기 같은 내가 신앙의 여정 가운데 끊임없이 동행해온 신앙운동이 하나 있다. 그것은 현대의 신앙공동체들 사이에서도 나처럼 말썽꾸러기 같은 취급을 받는 그런 신앙운동이다. 중앙이나 위에 있든, 언저리나 아래에 있든 상관없이 모두에게 근본적이며 급진적인 질문을 던지고, 모두에게 생존의 질문을 던지며 다양한 배제의 문제에 안고 있는 이들을 구원과 해방으로 초청하는 그런 운동이다. 그것은 바로 성령운동인 것이다.


4. 성령운동이 주는 긴장.

성령운동을 받아들이는 곳에는 언제나 긴장이 생기게 된다. 그러한 긴장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은사"와 "제도"사이의 긴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특히나 공교회성을 강조하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공동체일수록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렇지만 그러한 긴장이 꼭 그러한 신앙공동체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그러한 긴장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성령운동을 대표적인 지향과 특징으로 강조하는 오순절& 카리스마 교회들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학적으로는 종말론적인 교회론과 역사적인 교회론 사이의 긴장이고, 조직적으로는 평신도와 성직자 사이의 긴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하나의 사건"으로서의 교회로 접근하느냐 아니면 "하나의 조직"으로서의 교회로 접근하느냐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긴장은 분열을 위한 긴장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긴장이다.

동방정교회 전통의 요한 지지울라스 John Zizioulas는 교회에 대해 정의하기를, 그리스도가 "설립하였고" 성령으로 "조직된"것이라고 했다. 그러한 관점으로 봤을 때, 오늘날 이 땅의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아래에 있고 성령님에 의해 조직되고 유지될 때에만 진정한 교회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칼 라너 Karl Rahner의 말처럼, 교회는 교회 자체의 관점에서 이해되거나 정의될 것이 아니라 외부 곧 하느님의 성령으로부터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가 자신을 내어 준 것처럼 동일하게 세상에게 자신을 내어주어야 한다. 그렇기에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유대를 넘어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신 것처럼, 교회를 "넘어서"세상에게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것이다.


5.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들.

이처럼 교회로부터 시작하여 교회를 넘어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모든 존재들은, 그들과 만남을 통해 "성령님과의 교제"라는 사건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성령님의 교제 안에 들어오는 인간 존재들과 이 땅의 생명들은 각각 지나치게 개별화되고 고립화된 상태를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또, 끊임없이 소비하고 파괴하고자 하는 개인주의적인 경향과 왜곡된 정보의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성령님이 우리에게 그러하셨듯이 다른 사람과 생명들을 위해 선회 turning하여, 그들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게 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하며 하느님 나라를 기준으로 사회를 변혁하며 사는 종말론적 지향을 가지면서도, 지금 이곳에서의 성령체험(순간적인 신과의 합일)을 강조하는 체험적 지향을 가진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데 그저 넋 놓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희망하는 능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것을 위해 비관적 예언자의 자세로 정의와 평화(平和)를 추구하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추구의 동력을 세상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의와 평화의 근본인 하느님과의 깊은 영적 만남을 통해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신화를 향해감으로 헌신의 동력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가르치신 길 중에 하나만을 옳은 길이라고 왜곡하는 신앙공동체를 향해 증거자로서 존재하는 성령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신앙공동체와 투쟁해야 한다.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 불리기위해서라면, 성령님의 큰 품에 의지하려하지 않고 교권의 권위와 성서와 오랜 전통의 가르침의 해석들을 독점하여 지배하려고 하는 어긋난 신앙공동체와 순교의 정신으로 싸워 돌이키도록 해야 할 것이다. 싸움의 방식은 다양할 수 있으나, 최소한 왜곡되고 어긋난 신앙공동체에 안주하고자 하는 익숙함으로부터 순교의 자세로 탈주를 시작해야 한다. 익숙함에 안주하여 주저앉아 마지막 때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2nd zine]

참고도서
하나. 벨리-마띠 캘케이넨,『21세기 성령론』(프라미스, 2005).
두울. 류장현,『한국의 성령운동과 영성』(프리칭아카데미, 2004).


1) 이후 신앙공동체라고 줄여서 칭할 때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공동체를 뜻한다.
2) 여기서 말하는 가난이란, 소외와 배제를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다.
3) 'Radical'이란 단어는, '근본적, 기초적'이라는 뜻과 함께, '급진적, 극단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4)'Left'라는 단어의 어원에는'약한, 쓸모없는, 버려진'이라는 뜻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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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25,나눔에 대한 전교인 교육을 진행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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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07/03/31 12:32 2007/03/31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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