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 31일 종교개혁 기념강좌
정 병식 박사((Dr. Theol. 서울신학대학교 강사)
 
"루터와 성서"


[글순서]


A. 들어가는 말

B. 루터와 성서: 역사적 발전 과정

C. 루터의 성서이해의 특징

1. 성서해석학

2. 성서의 명확성의 문제; 내적인 말씀과 외적인 말씀

3. 율법과 복음

4. Exkurs: 율법의 이중 쓰임(usus, 사용, 용법)

D. 나가는 말

참고도서:

D.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Bd. 1-60, Weimar(1883-1983).; Briefwechsel, Bd. 1-18, Weimar(1930-1985).; WA Tischreden, Bd 1-6; Nr.5353 und 5375 d. Vgl. Johann Mathesius, D. Martin Luthers Leben in siebzehn Predigten, hg. von Georg Buchwald, Leipzig. Bernhard Lohse, Luthers Theologie in ihrer Entwicklung und in ihrem systematischen Zusammenhang. G ttingen 1995.; Ders., Handbuch der Dogmen und Theologiegeschichte Bd II. Hrsg. v. C. Andresen, G ttingen 1989.; Ders, 루터연구입문, 이형기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4.; E. Vogelsang, Die Anf nge von Luthers Christologie nach der ersten Psalmenvorlesung. Berlin/Leipzig 1929, p. 16. R. Schwarz, Luther, G ttingen 1986.; Helmar Junghans (Hg.), Leben und Werk Martin Luthers von 1526-1546. Festgabe zu seinem 500. Geburtstag, 2 Bde, Berlin bzw. G ttingen 1983.; Heinrich Bornkamm, Luther und das Alte Testament, T bingen 1948. Maurice E, Schild, Abendl ndische Bibelvorreden bis zur Lutherbibel, QFRG 39, G tersloh 1970.; G. Ebeling, '루터의 성서의 재발견', ZThK(1981), 신학사상 1983. 겨울호(루터500주년 특집).; Ders, Zur Lehre vom triplex usus legis in der reformatorischen Theologie, 1950, in: Wort und Glaube, T bingen 1960.; Ders, Lutherstudien I, T bingen 1971.; Gerhard Pfeiffer, Das Ringen des jungen Luthers um die Gerechtigkeit Gottes, pp. 163-202. in: B. Lohse, Der Durchbruch der reformatorischen Erkenntnis bei Luther. Darmstadt 1968.; Heiko A. Oberman,「하나님과 악마 사이의 인간 루터」이양호.황성국역. 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82.; Johannes Hilburg, Luther und das Wort Gottes in seiner Exegese und Theologie, darstellt auf Grund seiner Operationes in psalmos 1519/21 in Verbindung mit seinen fr heren Vorlesungen, Marburg 1948.; J. Wallmann, Kirchengeschichte Deutschlands seit der Reformation (UTB1355), T bingen 41990. John Goldingay, "Luther and the Bible."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Vol. 35, 1982, pp. 33-58.; Karl-Heinz zur M hlen, "Luthers Theologie", TRE 21, pp. 530-567.; Maurice E. Schild, Abendl ndische Bibelvorreden bis zur Lutherbibel, QFRG 39, G thersloh 1970.; Martin Brecht, Martin Luther. Bd II, Ordnung und Abgrenzung der Reformation 1521-1532, Stuttgart: Calwer 1994.; Otto Hermann Pesch, Thomas von Aquin: Grenze und Gr e mittelalterlicher Theologie, Mainz 1988.; Paul Althaus, Die Theologie Martin Luthers, G ttersloh 71994.; Pinomma Lennart, Sieg des Glaubens - Grundlinien der Theologie Luthers, G ttingen 1964.; R. Schwarz, Luther, G ttingen 1986.; Siegfried Raeder, Das Hebr ische bei Luther. T bingen 1961.; Wolfgang Sommer/ Detlef Klahr, Kirchengeschichtliches Repetitorium (UTB1796), T bingen 1994.; 오덕교, 종교개혁사, 서울: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1998.; 정병식, Martin Luthers Auslegung von Psalm 4 in den Jahren 1513-1521, Dissertation. Bonn 2000.; Ders, "시편4편 주해를 통해 본 마틴 루터의 신학"「성결과 하나님의 나라」(서울: 한들출판사, 2000), pp. 172-203.; 정태현, 성서 입문(상): 성서의 배경과 이스라엘의 역사, 한님성서 연구소. 일과 놀이사, 2000.



A. 들어가는 말

종교개혁이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를 반대하는 '95개 논제'로 시작되었다면, 오늘은 종교개혁 483주년을 맞는 날이다. 종교개혁은 한 수도사인 루터에 의해서 추진된 교회의 개혁이었으나, 그 파장은 사회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지나온 역사를 통해 종교개혁의 본질과 원리는 수도 없이 논의되고 연구되어 왔다. 이것은 역사를 현재와 미래의 반성적 거울의 역할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교권적인 오용및 성서와 무관한 제도의 남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와 신앙에 위협적인 요인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계속해서 언급되어야 하고, 그 본질에 대한 명쾌한 인식은 항구적으로 교회의 내.외적인 발전에 중요한 척도가 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은 새로운 성서이해의 결실이다. 더 나아가서 그것은 성서적 진리에 대한 재발견이기도 하다. 루터는 성서를 통해 인간의 정체(Identit t)를 새로이 인식했고, 구원은 교회가 가르치는 외적인 행위와 인간의 업적(meritum)이 아닌, 복음을 믿음으로 얻게 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신학적 주제는 인간의 구원 문제였다. 그리고 신학의 과제는 바로 이러한 구원의 문제와 그 확신을 주는 진리를 다루는 것이었다. 성서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연구는 그것이 신학적 주제와 신학의 과제의 원천(Quelle)이 되기 때문이었다.

본 소고는 두 가지 서술 방법을 고려했다. 하나는 연대기적인 역사 서술로서 루터가 성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된 계기를 시점으로 성서에 대한 그의 연구를 전반적으로 개괄했다. 이것은 루터와 성서를 통전적으로 볼 수 있는 장과 루터의 성서관의 역사적 정황과 배경을 제공할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적인 신학사상은 논쟁과 대립을 통해 그 내면적 실체를 드러냈다. 성서에 대한 루터의 깊은 사상도 탁상 위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특별히 1520년초 개혁파 내부의 급진적인 경향은 루터의 성서관을 심화시키는 자극제 역할을 했다. 다른 하나는 조직신학적인 서술방법이다. 루터의 전 작품을 통해 그의 성서적인 언급을 찾아내고, 그들 사이에 일목요연한 성서관이 있는지에 관심을 둘 것이며, 그의 성서 이해의 특징으로 성서해석의 문제, 성서의 명확성의 문제, 율법과 복음, 그리고 율법의 이중기능에 대하여 보충하여 다루어 볼 것이다.


B. 루터와 성서: 역사적 발전 과정.

루터와 성서의 본격적인 만남은 1508/9년 비텐베르그(Wittenberg)에서 이다. 스타우피츠(J. Staupitz)의 권고로 이곳에 온 그는 곧 성서 학사(Baccalaureus Biblicus)가 되었다. 이것은 교수로서 경력을 쌓아 가는 첫 단계였고, 강의에서 성서만을 낭독해야 하는 과제가 부여되었다. 스타우피츠는 루터가 신학자로서 삶을 시작하는데 진정한 조력자였다. 그는 루터에게 있는 신학적인 재능을 조기에 발견했고, 학위 과정을 밟도록 강권했으며, 비텐베르그 대학(1502년 설립) 성서 교수(Bibelprofessor)였던 본인의 후임으로 루터를 제안했다. 그로 인해 1512년 10월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1546년 죽기까지 34년 동안 루터는 성서를 연구하고, 성서를 논하며, 성서를 가르치는 교직에 들어섰다.

1513년부터 시작된 루터의 첫 강의는 시편(Dictata super psalterium)이었다. 1515년까지 2년에 걸쳐 시편 전체를 강의한 그는 1515-16년에는 로마서, 1516-17년에는 갈라디아서, 그리고 1517-18년에는 히브리서를 계속해서 강의했다. 바이마르 루터 전집(Weimarer Ausgabe) 4권에 해당하는 엄청난 분량의 이 강의 내용들은 루터가 직접 기록한 원고들이며, 부분적으로 학생들의 필기도 썩여 있다. 이러한 초기 강의들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신학적 자리를 점하고 있어서 오직 이 초기 성서 강의를 통해서만이 스콜라로부터 종교개혁 신학으로의 루터의 변화를 추적할 수 있고, 개혁자의 신앙적이며 신학적인 변화의 과정을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관찰 할 수 있다. 자신의 갈라디아서 강의를 기초로 루터는 1518/19년 갈라디아서 주석을 집필했다.

1519년부터 루터는 시편을 재차 강의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일련의 초기 강의를 통해 성서에서 직접 깨우친 새로운 시각과 인문주의(Humanismus)의 조력으로 획득한 원어 실력으로 전통적이고 스콜라적인 성격을 배제시키고 본래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코자 했기 때문이다. 이차 시편강의는 확실히 루터 자신의 원숙한 신학적 결실이기도 하다. 시편 연구(Operationes in psalmos)라고 칭한 이름에서 일차 시편강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학문적인 뉘앙스를 느끼게 된다. 일차 시편강의의 명칭인 'Dictata super psalterium'이 전통에 의존해서 기존한 시편 강해의 내용들을 모아 받아 적었다는 뜻을 가졌다면, 'Operationes in psalmos'는 전통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시편을 연구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루터의 이 강의는 1521년 시편22편을 마지막으로 중단해야만 했다. 본격화된 종교개혁으로 제국이 혼란에 빠지자, 황제 칼 5세(Karl V)가 보름스(Worms) 국회에서 변론하도록 출두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보름스 국회 후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성(Wartburg)에서 독거했다(1521.5.4-1522.3.1). 이 짧은 기간은 루터에게 또 하나의 창작의 시간이었다. 그는 성서 연구에 전념했다. 히브리어 구약성서와 라틴어 성서가 그에게 있었다. 복음서 및 바울 서신에 대한 주석과 미사의 오용 및 수도승의 서원이 잘못임을 논증하는 글도 썼다. 1521년 12월부터 1522년 2월까지 3개월이 소요된「신약성서 독일어역」은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인쇄업자 멜키오르 로테르(Melchior Lotther)가 비텐베르그에서 역자의 이름을 빼고 출판한 이 성경은 9월에 나왔다고 해서「9월성서」(September Bibel)라고 불리웠다. 희랍어로부터의 독일어역 신약성서라는 점에서 오늘날까지도 그 가치의 귀중함을 인정받고 있다. 루터는 여기서 바젤의 요한 프로벤(Johann Froben)이 찍은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Erasmus)의「희랍어 신약성서」(11516, 21519)를 이용했다. 성서번역의 직접적인 동기는 1521년 11월에 작성한 성탄절 설교(Weihnachtspostille)에서 찾을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성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본래적인 장소였다. 그 후 작성된 강림절 설교(Adventspostille)에서도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서를 매일 읽도록 요구하고 있다. 성서만이 용서와 위로를 준다는 것이다. 1522년 3월 기사인 하르트무트(Hartmut von Cronberg)에게 쓴 편지에서 성서번역이 불가피했음을 밝히면서,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자신은 그동안 배운 오류속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성서만이 명쾌한 신앙의 안내자였고, 성서번역은 자신이 배운 신학을 극복하는데 중요한 국면을 제공했다.

「9월 성서」에 루터는 서문(Vorrede)을 첨부했다. 이것은 율법과 복음의 차이점을 무시해버린 불가타 서문의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는 여기서 단지 네권의 복음서만이 아닌 신약 전체를 복음서라고 말한다. 복음의 내용은, 그에 의하면, 죄, 죽음, 마귀와의 싸움이며 그리스도를 통한 승리이다. 이것은 구원, 칭의, 그리고 공로 없이도 신앙인에게 주어지는 생명과 축복이다. 언약은 죽음에 몸을 맡긴 그리스도의 유업이 그 안에 있기에 복음인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인 복음은 메시야를 약속한 구약에 이미 시사되고 있고 신약에 다양하게 서술되고 있다. 신약 중에 어느 성서가 정말 귀한가하는 비평의 잣대는 성서에 대한 이러한 통전적인 이해에서 온 것이다. 1534년까지도 이러한 언급이 서문의 결론이었다. 루터는 우선 요한복음과 바울 서신, 그 가운데서도 특히 로마서와 베드로전서를 모든 성서 중에 가장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매일 빵을 대하듯, 매일 읽음으로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설교는 그 자신의 사역과 행위보다 우선적이다. 그 때문에 요한복음은 다른 세 개보다 유일하고도 가장 중요한 복음이라고 말한다. 야고보서는 이러한 의미로 볼 때 그 자체가 복음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지 않기에 여기서 '짚과 같이 메마른 서신'(stroherne Epistel)으로 표현된 것이다.

1520년대 초기 루터와 로마의 갈등의 폭이 깊어감과 동시에 비텐베르그 개혁자들 간에도 각종 이견이 속출했다. 이견들은 종교개혁 신학의 핵심적 사안인 교회 생활의 규범과 판단척도인 성서 이해, 구원 및 칭의와 관련된 것이었다. 루터의 부재 기간 중 비텐베르그의 종교개혁을 과격하게 이끈 칼슈타트(A. Karlstadt)와는 성서 이해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보여주었다. 칼슈타트는 1521년「De canonicis scripturis libellus」를 통해 야고보서에 대한 루터의 비판적 시각을 거부했다. 구원과 관련된 복음적 내용의 유무(有無)가 루터에게 판단의 척도였다면, 그에게는 성령의 활동과 율법의 실행이 가치 판단의 준거였다. 야고보서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칭의 및 구원이해에 있어서도 역시 차이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루터의 성서의 내.외적인 명료성과 율법과 복음에 대한 날카로운 사상은 이러한 교회내적인 위기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1524/25년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Erasmus)와의 논쟁에서 루터는 칼슈타트와의 대립을 통해 드러난 자신의 성서이해를 종합적으로 개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 성서학 박사로서의 성서 강의가 루터에게 신앙의 본질적인 내용을 새로이 충족시켜 주었다면, 교회 안 밖에서의 논쟁을 통해 루터는 성서를 어떻게 읽고, 깨닫고, 적용할 것인가를 구체화할 수 있었다.

1523년 루터는 신명기를 시작으로 강의 활동을 다시 재개했다. 1535년부터 죽기 1년 전인 1545년까지 행한 창세기가 그에게 마지막 강의였으며, 이러한 성서 강해와 더불어 끊임없이 논쟁서와 설교를 집필해야만 했다.



C. 루터의 성서 이해의 특징.

1. 성서해석학(Bibel Exegese)

성서해석은 루터 신학의 독특한 특징가운데 하나이다. 노팅험(Nottingham) St. John's College의 John Goldingay는 P. Althaus의 말을 인용하여 루터 신학은 성서를 해석하고자 시도하는 것 외의 아무 것도 아니며, 그 형태는 기본적으로 주해(Exegese)라고 말한다. 일차 시편강의에서 루터는 전통적인 주해 방식을 견지한다. 전통적인 주해 방식의 전형적인 두 틀은 자구 설명(glossen)과 본문 해석(scholion)이다. 본문 해석을 위해서는 노트를 따로 마련했으나, 자구 설명을 위해서는 라틴어 시편을 행간을 확대하여 인쇄해 사용했다. 그것은 강의를 위한 루터 자신의 준비와 자구설명을 받아 적는 학생들에게 편의를 주고자 함이었다. 일련의 초기강의에서 쓰였던 이러한 주해 방식은 1518년 이후에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본문 주해 방식(scholienartig)의 설명(explicatio)만이 유일한 형식으로 자리를 잡고, 본문을 언어학적이고 신학적으로 상세하게 해석해 나가고 있다.

초기 강의에서 루터가 사용한 해석 방법은 중세의 소위 '사중적 의미의 성서 해석'(der vierfache Schriftsinn)이다. 이것은 말씀을 네 가지 의미로 주해하는 방법이다. 문자적(buchst blich) 혹은 역사적(historisch)의미는 오늘날의 역사비평적 방법과 유사하다. 비유적(allegorisch)의미는 문자가 지칭하는 본래적인 대상이 따로 있다는 것이고, 도덕적(tropologisch) 혹은 신앙적 의미의 해석은 관련된 본문(Text)이 '지금 그리고 여기서'(hic et nunc)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추구하는 것이다. 마지막은 신비적(anagogisch)인 해석으로 일종의 종말론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이시기의 루터의 해석에는 전통적인 방식과 구별되는 다른 요소도 아울러 발견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해석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형식적인 이해를 버리고 성서의 구심점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율법의 수여자(Gesetz- geber)요, 신자가 본 받아야 할 모범(Vorbild/Exemplar)으로 본 중세의 형식적인 그리스도 이해(formal christologische Schriftauslegung)에서 그리스도를 성서의 중심으로 보아 시편을 예언적이고 그리스도론적(prophetisch-christologisch)으로 해석하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1516년 이후 더 분명해져서 형식적인 그리스도 이해는 점차 사라진 반면에 예언적-그리스도론적인 해석은 그리스도론적-신앙적인(christologisch-tropologisch) 해석으로 발전하게 된다. 루터는 오버만(H.A.Obermann)이 평가하듯, 중세의 성서해석 전통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단순히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해석은 전통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루터가 성서 해석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독자적인 노선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그것은 성서본문의 기독론적인 의미를 밝히고자 극도의 진지함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516년의 인쇄용 수정본(Druckbearbeitung) 시편4편 주석에서 루터는 기독론적인 해석이 모든 다른 해석의 머리요 원천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성도의 머리이며, 모든 것이 그로부터 나온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근원이며, 모든 시내의 원천(der Ursprung aller B che)이다. 모두가 그의 충만에 참여하고, 그로부터 모든 것을 받기에 그는 성서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principalis sensus)이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흘러나오는 강이 하나가 되어 흐르듯, 사중적 의미의 성서해석도 가장 넓은 하나의 강인 기독론적인 의미로 함께 합류된다는 것이다.

성서를 그리스도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 의미를 가장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루터의 확신은 전통적인 해석에서 이탈되는 출구가 되긴 했으나, 그 자체도 루터의 성서해석학의 종착역은 아니었다. 1519년 시작된 이차 시편강의(Operationes in psalmos)에서 루터는 문자의 문법적인 의미를 가장 본질적인 의미라고 강조한다. 성서는 오직 한가지 의미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문자적 의미(der w rtliche Sinn)이다. 성서의 문자는 알레고리적으로 어떤 다른 대상의 표상(Zeichen)이 아니라 그 자체가 뜻하는 바를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히브리어 성서와 루터의 성서 원어 지식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Johannes Hilburg은 그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로 시편4,8절을 말하고 있다. 전통적인 해석뿐만 아니라, 루터 역시 초기(일차 시편강의, 1516년의 인쇄용 수정본, 시4편과 5편에 대한 바티칸 단편)에는 이 구절을 성만찬에 연관시켰다. 그러나 1519년 이차 시편강의에서는 이 구절은 성만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현세의 복(die zeitliche G ter)으로 해석하고 있다. 성서의 중심인 그리스도도 구약성서 히브리어에 문자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루터에게 있어서 원 성서(Urtext)는 성서의 본래적 의미를 아는데 중요한 잣대를 제공하는 것이다. 원문에 근거한 성서해석 방법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그 시대의 교회적인 분위기와는 전적으로 다른 특징이다. 이러한 방법이 그를 신학의 새로운 방법론적인 영역으로 이끌어 주었고, 자신의 신학적 사고를 검증해 볼 수 있었으며, 낯선 권위(die fremde Autorit t)를 반박하는 자신의 주장에 더 큰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이차 시편강의에서 이전보다 더 흔히 등장하는 교회와 교황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은 원 성서를 깊이 연구한 결과 얻어진 루터의 신학적 결과들이다. 성서를 그들이 가진 말뜻을 따라 해석해야 한다는 것은 '성서가 성서를 해석한다'(sacra 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는 기본 원리를 내포하는 있다. 이러한 성서 해석의 원리는 성서의 중심 내용이 그리스도라는 사실과 결코 긴장을 일으키지 않으며, 자의적인 해석에 치우친 로마와 어거스틴의 영향으로 문자(littera)와 영(spiritus)을 구분하되 문자의 중요성을 도외시하고 영적 해석에 치우친 열광주의자들과의 논쟁을 통해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2. 성서의 명확성의 문제; 내적인 말씀과 외적인 말씀

성서의 명료성에 대한 문제는 1520년대 초 교회의 내적인 위기로 더 분명해졌다. 물론 루터는 초기 강의와 로마와의 논쟁에서 성서의 중심적 내용은 그리스도요, 성서는 이것을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시사했었다. 1521년 라토무스(Latomus)와의 논쟁에서 이와 관련하여 처음으로 스콜라 신학자들을 비판한다. 인간론과 은총론에 대한 그들의 설명으로 성서의 명료성을 무시했고, 이러한 방식으로 사안의 인식을 모호하게 했다는 것이다. 칼 슈타트나 토마스 뮌쳐등을 중심으로 한 열광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이러한 문제는 더 구체화 될 수 있었다. 사실 이것은 어거스틴의 문자(Buchstaben)와 영(Geist)의 구분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어거스틴 역시 내적 그리고 외적인 말씀을 구분한다. 말과 그 말이 나타내는 대상(Sache)사이에는 상징(성례전)과 그것이 나타내는 대상인 은총(Gnade)과 비슷한 관계가 성립하고 있다. 말씀(das Wort)은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진리를 가리키고 있다. 이 진리는 원칙적으로 표현될 수도 전달될 수도 없다. 그 때문에 어거스틴에게 말은 다만 '주어진 표지'(gegebene Zeichen)였으며, 사물 그 자체는 아니었다.

루터는 말씀에 대한 옛 구분을 배제하지는 않으나, 말씀과 영을 새로운 언어 철학을 이용하여 포개어 놓고 있다. 루터의 성만찬 이해는 그 대표적 예이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빵과 포도주안에 실재(realpr sent)하듯이, 진리도 말씀 안에 완성되어 있고 완전히 현재적이다. 진리를 말씀뒤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인간의 말 자체는 신적인 영의 담지자가 된다. 즉 영을 인간의 언어라는 외피가 감싸고 있는 것이다. 칼슈타트와의 대립에서 루터는 이러한 외적인 말씀의 절대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외적인 말씀은 성서에 그대로 드러나 있고, 설교를 통해서 새로이 선포되는 말씀이다. 성령은 결코 이러한 외적인 말씀과 독립하여 일하지 않는다. 1525년「천상의 예언자들에 반대하여」(Wider die himmlischen Propheten)라는 글에서 루터는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복음을 주셨고, 두 가지 방식으로 우리와 관계를 하신다. 하나는 외적이며, 다른 하나는 내적이다. 외적이라는 것은 그가 복음의 설교와 육적인 표시, 즉 세례와 성례전을 통해서 우리와 관계하시는 것이다. 내적이라는 것은 성령과 여러 은사와 더불어 믿음을 통해 우리와 관계하시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성서가 가지고 있는 내적인 말씀과 외적인 말씀 사이의 긴장의 문제는 1525년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에서 종합되고 있다. 성서가 중요한 사안에 대하여 분명하지 않기에 전통의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에라스무스의 주장을 루터는 일축한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드러나 있고, 오직 신앙으로만이 알 수 있으며, 성서의 이러한 중심 메시지는 결코 숨겨진 것이 아니라, 분명히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성서의 난해한 본문은 우리의 무지에 그 원인이 있다. 성서 본문의 어휘와 문법에 대하여 우리가 무지하기에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봉인이 깨지고, 무덤의 돌이 굴려져서 그것으로 최고의 비밀이, 즉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셨고, 하나님은 삼위인 동시에 한 분이시며,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고난 받으셨고 영원히 다스릴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이상 성서에 무엇이 더 숨겨져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초등학교에도 알려져서 그곳에서도 노래하는 것이 아닌가? 성서에서 그리스도를 취해 보라, 당신은 그 밖에 무엇을 더 찾을 수 있겠는가(Tolle Christum e scripturis, quid amplius in illis invenies)? 지금까지 말씀에 대한 무지로 인해 성서의 많은 구절이 모호했다고 할지라도 성서의 많은 것들은 분명히 인식될 수 있다." 모든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읽혀지고 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은 성서 전체가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다는 것과 무관치 않다.

이러한 성서의 명료성은 루터에 의하면 성서의 외적 명료성(claritas externa)이다. 이것은 내적 명료성(claritas interna)과 구분해야 한다. 내적인 명료성은 오직 성령을 통해 주어진다. 성령은 성서의 본질적인 의미를 깨닫도록 돕는다. 따라서 내적인 명료성을 말할 때, 만약 하나님의 영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성서의 획 하나도 이해할 수 없다. 두 종류의 말씀, 두 종류의 명료성과 함께 루터는 두 종류의 모호성(obscuritas)도 말하고 있다. 내적인 모호성(obscuritas interna)은 성서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성서의 내적 방어(die innere Abwehr)이다. 반면에 외적 모호성(obscuritas externa)은 몇몇 성서적 진술의 불이해성 또는 비접근성을 의미한다.

루터의 성서 이해는 그의 성서 해석의 원리와 긴밀한 관계 속에 있다. 성서의 문자적 의미는 그 자체가 명료하기에 교회의 교직(Lehramt)을 통한 해석이 필요치 않다. 성서가 자기 자신을 인증(引證)하고 자기 자신을 해석한다. 따라서 성서를 대하는 사람은 성서 자체가 지닌 명료성으로 들어가야 한다. 루터에 의하면 성서의 힘은 성서가 성서를 공부하는 사람 안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경외하는 사람을 성서와 성서의 능력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나를 너 안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내 안으로 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3. 율법과 복음

율법과 복음의 구분 역시 열광주의자들, 특별히 칼슈타트, 아그리콜라, 그리고 반율법주의자 들과의 논쟁 및 중세의 이해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비텐베르그에서의 과격한 종교개혁은 율법과 복음의 엄격한 구분과 그로 인한 경직된 이해에서 온 것이다. 성상과 제단은 과격한 이들에게는 철저히 구약 율법의 틀 안에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율법을 폐기 처분했다. 이미 효력이 정지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그러한 태도 자체를 기독교인의 자유를 다시금 율법으로 만들 수 있는 위험한 것으로 간주한다. 성상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문제는 그것을 경배하는 것이다. 율법은 여전히 그 의미를 상실하지 않았다. 1522년 성탄 한주전 강림설교에서 루터는 율법과 복음을 처음으로 상세히 구분하고 있다.

율법과 복음은 우선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두 개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의 두 측면이다. 그것은 마치 오캄주의가 하나님의 능력을 표현할 때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potentia Dei absoluta)와 질서에 메이는 능력(potentia Dei ordinata)을 구분하는 것과 같다. 율법과 복음은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과 복음이라는 이중의 형태로 인간에게 다가온다. 루터에 의하면 신학적 완성의 척도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율법과 복음을 잘 구분하는데 있다. 1513/15년 일차 시편강의에서 문자로부터 영을 구분하는 것이 가장 뛰어난 일인데, 그것이 참된 신학자를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1524/5년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에서 루터는 그가 율법과 복음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고 질책한다. 1531년 갈라디아서 강의에서 '어느 대학에도 이러한 구분은 없으며, 어느 박사도 어느 신학자도 어떤 교부들도(어거스틴에게는 약간 있긴 하나) 히로니무스에게도 없다. 이러한 구분이 보존되지 않으면, 기독교 교리도 유지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고, '이 둘을 잘 구분하면 그도 역시 신학자'라고 말한다. 1532년 설교에서는 율법과 복음의 구분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뛰어난 기교'라고 선포한다. 1537년 반율법주의자 들과의 논쟁에서 보여주듯, 루터에게 있어서 바른 교리를 전수하고 보전하는데 이러한 방법, 즉 기독교 교리를 율법과 복음으로 나누어 따르는 것보다 더 좋은 방식은 없었다.

둘째로 율법과 복음은 서로 대립(Gegensatz)하면서도 일치를 이룬다. 율법은 하나님의 진노아래 세우나 복음은 은총을 가져온다. 율법의 본연의 임무는 고발하고 죽이는 것이요, 복음의 의무는 살리는 것이다. 율법은 무엇을 해야하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요구한다. 그리고 요구된 바대로 수행되지 못했을 경우에 고발하고 정죄한다. 반면에 복음은 언약(promissio),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 내용으로 삼는다. 내용에 있어서 이처럼 서로 반립 되는 율법과 복음은 다른 한편 말씀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복음은 반드시 율법과 그의 선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죄 사함에 대한 선포이다. 이 죄사함은 죄 자체를 전제하고 있고, 이 죄는 율법이 있는 곳에서만 인식된다(롬3,20; per legem enim cognitio peccati). 따라서 율법이 폐기된다면, 죄도 폐기되고, 죄가 폐기된다면 그리스도는 더욱 불필요 할 것이라고 루터는 주장한다.

세 번째로 루터의 율법과 복음이해는 변증법적이다. 정과 반이 궁극적으로 합을 이루듯, 율법과 복음이 상호간에 수행하는 역기능 속에서 본래 목적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어거스틴의 구속사적 구분을 극복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그의「영과 문자에 관하여」에서 율법과 은총을 구분했고, "율법은 은총을 찾도록 주어진 것이고, 은총은 율법을 성취하도록 주어진 것이다"고 말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위해 임시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후자가 이루어졌을 때 전자의 역할은 끝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에 의하면 율법이 복음에 의해 폐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과 복음은 구약이나 신약에서 서로에 대해 하나의 변증법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다. 구속사적 구분을 넘어서고 있는 이러한 변증법적인 루터의 이해를 로제는 '종교개혁적인 새로운 구성'(die reformatorische Neuformulierung)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이해가 결국 율법은 시청의 담당이요, 교회는 오직 복음만을 선포해야 한다는 과격자들의 이분법적인 이해에 반대한 원인이 되었다. 율법 역시 교회에 의해 선포될 수 있다. 율법과 복음을 구분하는데 있어서 구약은 항상 율법이고 신약은 항상 복음이라고 이해하거나, 특정의 성서구절에 대해 이것은 항상 율법, 저것은 복음이라고 도식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율법에 해당하는 본문들도 복음적인 측면이 있고, 복음에 해당하는 본문들도 율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라는 말로 그의 현재를 약속하는 한 율법의 총체인 십계명에도 복음이 있다고 루터는 말한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화해와 구속의 핵심인 동시에 인간의 죄에 대한 가장 혹독한 심판이라는 점에서 복음인 동시에 율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율법과 복음의 구분과 그 적용은 매 경우마다 다르며, 특별히 그때 그때의 연루된 삶의 정황을 면밀히 고려해야만 한다. 고통, 영적 시련 또는 어려운 경험이 있는 곳에는 복음이 우선적으로 선포되어야만 한다. 이와는 달리, 자기만족 혹은 교만으로 인해 율법적 상황이 부인되는 곳에서는 회개와 심판을 촉구하는 율법의 선포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루터에게 있어서 율법과 복음의 구분은 말씀이 선포 될 때의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신학은 그 때문에 복음과 율법의 구분을 개방해 둘 과제를 우선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 둘은 지속적인 상호연관성을 통해 그 참된 본질과 본래적인 기능 안에서 유지되어야만 한다.



4. Exkurs: 율법의 이중 쓰임(usus, 사용, 용법)

정확히 말하자면 1519년 이후, 그리고 1522과 1523년 비텐베르그 개혁자들과의 논쟁에서 루터는 율법에 있어서 '쓰임, 혹은 사용'(usus)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율법의 쓰임은 이중적(duplex usus legis)이다. 율법의 이중 기능이나 이중 사용이라는 표현 방식은 루터에게 결코 경직되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율법의 쓰임이나 활용 방식에 따른 구분이어서 공식처럼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율법의 이중적 작용 방식에 대한 공식과 같은 구분과 적용은 1540년도 이후 멜란히톤에게서 처음 나타난다.

율법의 이중적 사용(기능)은 정치적(politische) 또는 시민적(b rgerliche) 쓰임과 신학적(theologische) 쓰임(Brauch)이다. 전자를 통해서 이 땅에서의 악한 범법 행위와 파괴 행위를 막고 외적인 질서와 공공의 평화를 유지한다. 이 일은 하나님이 그 일을 위해 세운 세속정부의 관리, 부모, 교사, 그리고 판사가 수행한다. 이들은 신적인 계명을 가르치고, 인간의 양심을 지도할 과제를 부여받는다. 정치적 기능의 율법이 잘 준수될 때 인간은 시민적 의(iustitia civilis)를 얻게 된다. 이러한 의는 그러나 외적인( u ere) 의이며, 신학적 의로 연장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루터는 이러한 정치적 율법의 쓰임을 높게 평가하기는 하나, 교회의 본질적인 의와는 엄격한 경계를 설정한다. 반 율법주의자와의 두 번째 논쟁에서 루터는 "정치적인 의는 비록 그것이 하나님 앞에(vor Gott) 설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좋은 것이며 칭찬할 만하다... 세속적(시민적) 의는 그에 해당하는 영광과 보상을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받는 것이지, 하나님께 받는 것은 아니다"는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신학적 쓰임은 본질적이며, 신앙적, 그리고 영적 의미의 율법이다. 신학적 기능은 율법의 본래적인 과제이다. 이러한 기능은 인간에게 죄를 보여 주어, 그가 죄를 극복하게 해주는 기능이다. 이 때문에 '극복하게 하는 율법의 기능'이라고도 말한다. 율법은 인간을 고소하고, 그를 놀라게 하며, 죄지은 그는 하나님 앞에 있는 자가 아님을 보여준다. 인간은 이러한 율법을 피할 수 없다. "쉽게 없앨 수 있는 것처럼, 비록 네가 율법(LEX)이라는 글자를 지우고 싶어한다고 할지라도, 우리 마음에 쓰여진 글자는 남으며, 그것이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를 시험한다." 이렇게 영적으로 이해된 율법은 인간이 의를 이루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 반대로, 율법은 인간의 죄성을 밝혀주고, 그래서 인간의 죄성은 이로 인하여 더 늘어난다. 죄를 더하는 율법의 이러한 기능을 '작용 원인'(causa efficiens)이라고 하지 않고, '명시 원인'(causa ostensiva, 드러내어 분명히 보여주는 기능)이라고 루터는 말한다. 율법의 신학적 기능은 죄를 크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 한가운데를 강타해서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디에도 도움이 없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때 인간은 비로소 죄의 세력을 알게 되며, 헤어나올 수 없는 곤궁가운데서 그 자신의 무능함을 인식하게 된다.

인간은 확실히 율법의 신학적 기능이 그에게 준 이러한 인식을 지탱할 수 없다. 인간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은 복음으로 인해 극복이 된다. 율법과 복음은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서로 상반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나, 복음은 죄 사함을 선포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진노아래 세우나 복음은 은총을 가져온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선포하는 것,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이란, 본래적인 정의에 의하면, 율법의 공포로부터 자유케 하며, 죄와 죽음으로부터 은총과 죄의 용서, 그리고 의와 영생으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이다." 복음과 율법이 서로 대립된 내용을 가졌으나, 결코 구분하거나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루터는 주장한다. 오히려 이 둘은 회개와 죄 사함의 관계처럼 서로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은 죄 사함에 대한 선포인데, 그 죄는 율법으로 인해 인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음은 율법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루터는 말씀의 선포자는 복음과 율법, 이 둘을 다 선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죄인이며 영원히 저주받을 자라는 율법의 폭로와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으로 이루어진 때문이다. 이 둘은 전체를 이루는 것이며, 둘 다 교회에 간직되어야 한다.

교회는 율법의 두 가지 쓰임을 선포해야 한다. 정치적 기능에 관한 한, 교회는 세속정부에 그들이 해야 할 구체적인 일들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 루터에 의하면, 교회는 그에 대한 어떤 위임도 받지 않았다. 교회는 선포를 통해 세속정부가 하나님이 부여한, 즉 잘못되고 있는 세상에서 외적인 평화와 질서를 바로잡을 임무를 상기시켜야 한다. 동시에 영적인 영역에 간섭하려는 것을 경고해야 한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신학적 기능이다. 복음은 율법과 그의 선포를 전제한다. 신앙은 죄의 인식을 전제하고 있다. 신앙은 죄의 인식과 결부되어 있다. 죄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은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롬4,5절). 하나님 앞에서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 의롭게 한다는 말은 믿는 자에게 율법이 폐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구원의 방편으로서 율법은 끝났으되, 그리스도인이 죄인인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율법은 여전히 그 효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D. 나가는 말.

루터는 설교자요 주해가로서 성서와 끊임없이 대화하며 사고한 그 전례가 없는 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몸담고 있던 중세적인 환경을 극복한 것도, 새 길(via moderna)로 대변되는 오캄주의적인 신학적 틀을 탈피한 것도 성서를 의지한 때문이다. 동시대의 많은 다른 신학자들과는 달리 성서에 쏟아 부은 그의 열정과 탐구력은 인문주의의 자극이나 어거스틴의 영향보다 독자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서를 통해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세계가 바르지 못함을 인식했고, 성서로 인해 그는 개혁자가 되었다. 시편을 비롯한 초기 성서주해는 자신이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한 가늠자 역할을 해 주었다. 그에게 있어서 교회와 신학의 과제는 인간의 구원이었다. 그리고 죄인 된 인간의 참된 구원의 해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 속에 그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바울 서신 가운데 로마서는 인간과 죄,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말해주는 영적인 근원이었다. 그는 대중과 이러한 영적인 깨달음을 함께 공유하기를 원했다. 그는 성서를 번역했고, 이로 인해 성서는 닫혔던 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대중에게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교회의 오류와 교권의 남용은 교회의 성서독점에 많은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서의 바른 이해는 본문의 본래적인 뜻과 그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있다. 본문의 어구가 가지고 있는 '문자적 의미'(literal sense)의 파악은 루터에게 가장 근본적인 것이었다. 문자적 의미는 성서가 본래 말하고자 의도하는 모든 것의 필요 충분 조건이 된다. 하나님은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 일은 글자 하나 하나를 역사.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축자주의(Literalism)는 물론 아니다. 오히려 저자가 본문을 기록할 때 자구에 담고자 했던 의미를 깨우치려는 노력이다. 루터의 주요관심은 교회의 영적 갱신이다. 그것은 성서의 중심 메시지를 철저히 이해함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루터에 의하면 성서의 중심 메시지는 그리스도였다. 그는 인간의 죄를 대속했고, 하나님과의 화해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기에 그는 신앙의 대상이요. 궁극적 표상이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메시지요. 복음이다. 그리스도를 제쳐두고 성서를 논할 수 없다는 것은 개혁자 루터의 지론이었다. 이러한 영적 갱신은 신학으로 하여금 그 본래의 사명을 다시 성취하도록 도와주게 될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율법과 복음은 단순한 이원론적인 도식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흑백논리처럼 십계명은 항상 율법이며, 십자가는 항상 복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약은 항상 복음이며, 구약은 항상 율법이라는 논리도 가능치 않다. 십계명에서도, 루터에 의하면, 복음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하나님께서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라고 말함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하나님으로 자신을 선포할 때, 그 십계명은 율법이기보다는 복음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에도 이와 동일한 적용이 가능하다. 십자가는 기독교 화해와 구속의 요체로서 '복음'이지만, 그것이 인간이 저지르는 죄에 대해서는 심판이 있음을 고지하기에 그것은 율법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불신자들에게는 이 경우, 정죄 하고, 책망하는 율법의 기능을 십자가가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과 복음과 연관해서 성서를 대할 때 경직된 태도로 말씀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연루된 상황을 주의 깊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루터의 의견이다. 현재, 고통, 영적시련, 어려운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성서의 복음적인 측면을 먼저 얘기해야 하며, 이와는 반대로 교만이나, 자기의(義)에 사로잡힌 자들 앞에서는 말씀의 율법적 측면을 설교해야만 한다. 율법과 복음의 이해는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위한 전제적 역할을 한다는 제한적 기능의 틀을 벗어나서 기능이 상반적이긴 하나 상호작용하고 동반자라는 점에서 그리고 둘의 연합작용 속에서 제3의 합을 도출해 낸다는 점에서 변증법적 이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 죄인과 그에 대한 구원의 선포, 그리고 그 실체인 칭의에 대한 모든 설명은 성서에 있다. 성서는 죄인 된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참된 해법의 담지자요, 그 자체로서 부족하지도, 과도하지도 않다. 하나님의 약속과 복음을 아는데는 오직 성경만으로 족한 것이다. 전통도, 교황의 권위도, 성직자의 교권도 불필요하다. 오직 성서만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오직 성서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으며, 오직 성서만으로 믿음과 구원에 이르는 복음을 접할 수 있다. 오직 성서만이 정체성을 상실한 사회와 교회에 바른 길을 제시할 수 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Posted by 자캐오

2007/04/07 04:38 2007/04/07 04:38
이올린 태그검색올블로그 태그검색태그스토리 태그검색티스토리 태그검색, 이올린 태그검색올블로그 태그검색태그스토리 태그검색티스토리 태그검색, 이올린 태그검색올블로그 태그검색태그스토리 태그검색티스토리 태그검색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www.zacchaeus.kr/rss/response/32

Trackback URL : http://www.zacchaeus.kr/trackback/32

Leave a comment
[로그인][오픈아이디란?]
« Previous : 1 : ... 948 : 949 : 950 : 951 : 952 : 953 : 954 : 955 : 956 : ... 978 : Next »

블로그 이미지

가난, 소외, 여성 & 그 언저리에 함께 하는 무지개빛 성령님...

- 자캐오

Calendar

«   2018/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Site Stats

Total hits:
318534
Today:
71
Yesterday:
130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