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년 12월 8일, 말씀나눔]

"두 가지 길."

오늘 본문, 누가의 복음서 18:9~14..



 이 말씀을 나누는 지금 저는 먼저, 우리 공동체 앞에서 회개함으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사랑이신 주님의 기준이 아닌 제 기준에 죄인처럼 보이던 이들을 정죄하던 제 입술과 눈과 마음 그리고 삶의 태도와 생각을 말입니다.

 저는 지금 제가 속해 있는 성공회라는 공동체와는 많은 다른 공동체에서 3년을 공부했고 기도하며 자라왔습니다. 그곳에서 아웃사이더처럼 이질적이던 제가, 그런 이질적인 저를 감싸주고 받아주며 저의 찌르는 말을 감수하던 동료들에게 자주 이야기하던 건, "성령운동을 한다는 우리가 가장 성령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다. 심지어 이곳에 성령님이 안 계실 수도 있단 걸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먼 바다에서 항구를 향해 등대의 등불을 따라 온 배처럼 그렇게 나눔의집으로 다시 도봉교회로,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여러분과 더불어 기도하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오늘 저의 삶을 가만히 돌아보니, 저는 참으로 나만 옳은 줄 알고 남을 쉽게 정죄하고 업신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야기 가운데 나오는 율법학자들과 과부 중에서 율법학자들이 바로 저와 같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들은 모든 것을 철저히 지키는 의인들이었습니다. 눅18:9~13에 잘 나와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보시기에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인 그들은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라고 기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 옳고 옳아서 그들 곁에 죄인들이 있으면 알아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그런 바리새인. 20장 41절의 말씀처럼, 거룩함의 모든 외형적인 것들을 치렁치렁 달고 있는 바리새인.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흠이 많은 이들이었습니다. 왜냐면 이들은 너무나 거룩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자비가 존재하는 곳에서만 있을 수 있는 죄인들은 이들을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저를 보는 듯한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은 너무 다릅니다. 예수님의 곁에는 항상 죄인들이 있었습니다. 세상과 사람들이 보기에 뭔가 부족한 사람들 말입니다. 죄인이라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흠잡을 것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 기도드리기 위해 들어서는 회당에서조차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들어가야만 했던 그런 과부였습니다. 정결하지 못한 여인이었고, 손가락질 받던 세리이었고, 앞 못 보고 듣지 못하는 장애인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 바로 이와 같이 고침이 필요한 사람, 주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고픈 간절함이 가득한, 그러나 어떻게 하면 낫는지도 모르기에 늘 모든 것이 두려워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게 되는 그런 죄인들이 늘 예수님 곁으로 곁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런 죄인 중의 한 명인, 문제 있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인 과부는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전부를 다 바쳐 하느님의 자비를 구했습니다.
 너무나 가진 것이 많아서 그 중의 몇 가지만 하느님께 드리는 부자. 하느님 앞에서조차도 선택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그런 부자.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고,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뒤돌아서서는 죄인들을 손가락질하거나 아니면 짐짓 그들의 죄를 염려하는 듯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며 으스대는 부자와 같은 저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따라할 수는 있어도 그 진정성을 인정받기가 힘든 일을, 오늘 이 과부는 행한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하느님의 자비를, 그 긍휼을 구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부자들의 의로움. 그래서 그 의로움 곁에만 가면 모든 인간들이 죄인이 되고 마는 바리새인과, 가난하게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과부의 마음과 삶의 태도.
 그래서 하느님께서 자비와 긍휼로 그 모든 죄를 탕감해 주실 수 밖에 없게 고개 숙이는 과부. 그리고 그런 죄인들이 늘 곁으로 곁으로 다가가고 싶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지금 누구를 닮아있는 것일까요? 하느님의 자비조차도 필요 없는 나의 의로움에 누군가 저 구석에서 슬피 울고 있는 건 아닐까요. 아니면 나의 낮음을 보시고 주님께서 자비를 허락하셔서 그 자비가 있는 곳에서만 숨쉬며 살아갈 수 있는 이 땅의 죄인들이 우리 곁으로 찾아올까요.
 레온하르트 라가츠의 『예수의 비유』라는 책에 있는 말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진리란 강요되고 억압하여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이 스스로 그것을 진리라고 깨달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도록 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무리 옳은 것일지라도, 억압되고 강요되어 그것을 행하게 하는 것과, 포기하지 않고 인내함으로 함께 그 길을 걷는 것.
 우리는 이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저는 분명 이 둘 중에서 좁은 길이 주께서 걸어가셨던 길이라고 받아들입니다. 힘들고 쉽게 선택하기 어려운, 인내와 애달픔, 그리고 받아들임이 있어야지만 걸을 수 있는 길. 오늘 저는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그 길을 걸어가고자 합니다.
 이 기도실을 나가는 순간 또 다시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삶의 태도 그리고 주님의 마음이 아닌 내 기준으로 남을 쉽게 정죄하고 욕할지라도 다시 그 길로 들어서기를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면 우리들의 주님께서 먼저 그렇게 사셨고 매 순간 저와 우리를 그 길로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06년 12월 8일, 바람숨결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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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07/04/28 18:51 2007/04/28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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