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요나 목사님의 지적(?)에 대해, “하느님의 형상과 모양대로”는 그런 게 아니라는 저의 반박을 접한 한 분이 질문을 하시더군요.

“특별히 자캐오 신부님’만’ 그렇게 해석하는 게 아닌가요? 성공회 사제나 신자들 대부분 그렇게 해석하시나요?”

그분을 위해서 최근에 ‘비아’에서 나온 책이자, 조만간 길찾는교회에서 ‘견진 과정 필독서’로 함께 읽고 토론할 책인 <질문과 답변, 성공회 신앙 안내>에서 한 부분을 읽어 드릴까 합니다 ^^


(질문)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창세기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셨다.” (창세 1:26-27)

이 본문은 모든 인간 존재의 구별된 지위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종종 라틴어로 ‘이마고 데이’(imago Dei)라고 부릅니다)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이는 우리가 모든 사람을 고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교리에는 더 많은 것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주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물리적인 육체를 가지고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지녔다는 말은 하느님 안에서 관계를 맺고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도덕적 판별력과 결합하여 있고 그것이 우리 인간성 안에 투여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모든 피조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세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할 수 있는 이성적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그 능력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 존재의 목적은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의존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느님과, (우리가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하는) 자연과, 우리 서로가 올바르게 수립된 관계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한 목적은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진리에 의해 실현될 수 있습니다.

- 이언 S.마컴∙ C.K. 로버트슨 지음, 양세규 옮김∙주낙현 해설, <질문과 답변, 성공회 신앙 안내> 비아, 84-85쪽 가운데.

보셨죠. 제가 특별한 게 아닙니다.

대한성공회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꽤 많은 세계 성공회 사목자들이나 신자들이 저처럼 생각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도 그분들처럼 생각하는 겁니다 ^^

여러분~ 성공회로 오세요~ 한 번 말고, 두 번 오세요 ㅋㅋㅋㅋ

* 같은 책 133쪽을 덧붙여 드립니다. “성공회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나요?”

간단히 말하자면, 성공회 신자는 성서를 아주 진지하게 이해합니다. 진지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결이 매우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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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8/05/04 02:47 2018/05/04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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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요나 목사님. 재밌는(?) 분이다.

일단 상대에 대해 말하기 전에 ‘기본 정보’ 정도는 알아보는 게 좋다. 이분은 내가 ‘성공회 신부’인 걸 모른다. 아니, 모르고 싶은 걸까 ^^;;

아무튼, 이분은 당신과 나의 ‘신학과 해석의 다름’을 ‘다른 성경 사용 문제’로 묘하게 비튼다. 심지어 내가 무지하다고 단정해 버린다.

정말? 누가 무지한 걸까. 이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라는 성서 구절이 유대교부터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그룹들에 의해 얼마나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는지 모르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 이성애’라는 해석이 왜 ‘편협한 주장’인지 모를 수가 없다. 소위, 정통 신학 안에서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는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어왔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주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대해 ‘사랑과 관계로서의 존재’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편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라는 성서 구절에 대한 해석에서 중요한 논점은, 이요나 목사님이나 일부 근본주의자들이 우기고 싶은 것과 별 상관이 없다.

이 부분에서 중요한 건 ‘하느님의 형상과 모양이 이성애냐, 동성애냐’는 게 아니다. 자신들에게 ‘이성애냐, 동성애냐’라는 게 중요하다고, 하느님마저 그렇다고 생각하는 그 ‘편협함’은 대체 어찌해야 할까 ㅡ.,ㅡ^

하나만 묻자. 이성애자의 하느님은 이성애자인가? 이 얼마나 웃기는 주장인가. 하느님은 이성애자도 동성애자도 아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은 하느님’일 뿐이다. 이성애자를 비롯해, 다양한 성 정체성을 가진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다.

다만, 그 하느님은 성서와 교회를 통해 상대적으로 작고 연약한 취급받는 사람들의 편으로 고백되어 왔다. 그러므로 ‘이 시대와 사회에서 누가 그 존재와 정체성 때문에 작고 연약한 사람 취급받고 있는가’를 질문하는 게 중요하다.

그건 그렇고.. 이요나 목사님 말대로라면 세계 성공회, 미국 감리교회나 장로교회, UCC 등 주류 개신교회에 속한 많은 목회자들이 “이단자던가 아니면 성직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대체, 이 ‘교만함과 근자감’은 어디로부터 오는 걸까.

더 황당한 건 다음 구절.

“더 큰 문제는 이런분에게 상담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 이유는 하와가 뱀에게 상담을 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인의 길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아.. 이요나 목사님한테는 나같은 사람이 “뱀”이었구나.. 창세기에 나오는 뱀..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니다. 기가 막혀서 정말 상대하기가 싫어진다.

이요나 목사님이나 그의 지지자들은 우리보다 넓고 깊고 높고 크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왜곡해서 ‘쪼잔한 하느님’으로 만들고 있는 게 누군지 정말 모르나 보다. 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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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8/05/03 02:18 2018/05/03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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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30일. 빈집 식구들의 아지트로 오래 자리를 지켰던 ‘빈가게’의 정신을 잇고 확장하고자 시작한 용산나눔의집 ‘해방촌이야기’의 마지막.

철거를 끝내고, 저녁에 모인 빈집 식구들은 ‘해방촌이야기’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했다. 나도 그 가운데 한 명으로 잠시 자리를 지켰다.

같은 시간대. 안전장치 없이 진행 중인 ‘해방촌 도시재생사업’의 근거지 신흥시장에서는, ‘무려’ 골목길 상권 살리기를 목표(?)로 하는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촬영 중이었다.

오랜 시간 동네 골목을 오가는 ‘가난한 동네 사람들’의 벗으로 존재했던 공간.

그 공간이 쫓겨나는 날, ‘갓물주 네트워크’와 그 곁에서 떡고물을 먹고 자라는 부동산업자 등 ‘부유한 동네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는 ‘뜨는 동네 이미지’에 기름을 붙는 일이 시작됐다.

성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쫓겨나는 사람들과 그를 편드는 하느님에 대한 고백과 부르짖음으로 가득하다.

왜일까. 그만큼 이 세계는 하나라도 더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하고자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몫을 탐내는 일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부터 하나씩 쫓아내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성서는 더욱 더, 쫓겨나는 사람들과 그들을 편드는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종종 내게 ‘이 따위 세상에 하느님이 어디 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 애통하는 마음으로 답한다.

“하느님은 우리들 가운데 계십니다. 하느님의 집이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인데, 더 가진 사람들에게 그 집을 빼앗긴 하느님께서는 ‘가만히’ 있지 않으실 겁니다. 우리를 통해 그 모든 불평등과 정의롭지 못함을 ‘새롭게’ 하실 겁니다.”

나는 낙관적이지 않지만,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싸울 거다. 내가 죽기 전에 그날을 맞이하지 못하더라도, 한 걸음이라도 나아갈 것이다. 하느님은 바로 당신과 나,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 때 나는 옥좌로부터 울려 나오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 때 옥좌에 앉으신 분이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하고 말씀하신 뒤 다시금 "기록하여라, 이 말은 확실하고 참된 말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공동번역개정판, 요한의 묵시록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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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2 03:33 2018/05/02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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