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나눔] 내 거친 손

나는 내 ‘거친 손’을 사랑한다. 그래서 누가 내 울퉁불퉁한 손을 보고 이런저런 질문을 하면 아무렇지 않게 친절하게 대답한다.

어릴 적부터 운동을 해서 생긴 굳은 살들. 이런저런 이유로 가난해진 집에서 자라면서 더 거친 손이 되었다고. 그런 굳은 살들이, 언젠가부터 불안하거나 집중해야 할 일이 생기면 단단한 곳에 내리치거나 물어뜯는 버릇 때문에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

나는 종이에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는 만년필 쓰는 걸 좋아한다.

누군가 내게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성공회 사제가 무슨 비싼 만년필을 쓰냐고 비꼬아 물은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누가 쓰다가 선물한 그리 비싸지 않은 만년필을 사용하던 중이라, 바로 가격을 말해주고 ‘생각만큼 비싸냐’고 반문한 기억이 있다.

만년필을 ‘서명용’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야 ‘만년필 = 비싼 사치품’ 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소위 ‘고시생 만년필’이라고 불리는 잉크통이 큰 만년필을 주로 쓰는 내게는 꼭 그렇지 않다. 그냥 종이에 끄적일 때마다 사각거리는 느낌이 있는 기분 좋은 필기구일 뿐이다.

그 독특한 느낌과 기분을 위해, 나는 조금씩 돈을 모아 내가 사용하기 적절한 필기구를 구입해서 쓸 수 있다. 무엇보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싼 필기도구를 ‘당신이 보기에 비싸다’라는 이유로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어떤 버릇 때문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지금의 나를 만들고 드러내고 있는 것들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나. 어떤 선택이든 타인의 시선과 기준보다는 내 기준과 근거에 따라 설명할 수 있는 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나. 타인이 찍어 준 한 장의 사진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마주하게 된다.

지금까지 KTX 해고 승무원 분들과 함께 하는 거리 기도회, 화요일마다 진행하는 모임들 때문에 처음으로 찾은 ‘궁중족발을 지키기 위한 현장 기도회’.

계속되는 어려움에도 꿋꿋히 궁중족발을 지키는 여러 사람들을 보며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 시간. 한 장의 사진은 내게 이런저런 말을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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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0 03:02 2018/04/10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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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대 교목실에서 일했던 몇 학기 동안 ‘언저리에서 만나는 종교’라는 제목으로 진행했던 채플 수업. 이번 학기부터는 강조점을 조금 달리 해서 ‘쟁점으로 만나는 그리스도교’라는 제목으로 진행하고 있다.

나는 기독교와 현대 사상은 각각 그 나름대로의 맥락이 있어서, 그 둘을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으로 접근하고 이해할 때에 가장 적절한 동행이 이뤄진다는 입장이다.

이를 위해 이번 학기는 ‘기독교와 페미니즘, 기독교와 임신중단권, 기독교와 퀴어’라는 3가지 주제를 정했다. 그리고 그에 적절한 세 분의 특강 강사를 섭외했다.

나는 ‘현장에서 부대낀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지난 월요일 특강 강사였던 홍혜은님, 4월 마지막 주에 만날 나영님, 그리고 5월에 만날 홀릭님 모두 현장에서 부딪치고 부대낀 이야기를 담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 덧. 종교법인이 설립한 사립 종합대학교인 성공회대학교. 그래서 아직까지 2학기는 채플 수업을 이수해야 한다. 물론 십 여 가지 수업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지만, 의무다.

그런데 나는 이 땅에서 운영되는 ‘대학교’에 채플이란 이름으로 진행되는 의무 이수 수업이 필요한 지 계속 묻게 된다. 만약 법인의 설립 이념을 공유하기 위한 거라면, 나는 ‘교양 선택’이나 ‘메리트가 있는 교양 필수’로 바뀌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

——————

- 2018년 1학기, 성공회대 채플 수업 “쟁점으로 만나는 그리스도교” 15주 세부 일정 -

01주, 03/05: 수업 소개

02주, 03/12: 종교, 뭘까?! (공통)

03주, 03/19: ‘성서’라는 고전. 다양한 스펙트럼의 기독교. 그 해석의 다양성 (공통)

04주, 03/26: 기독교와 페미니즘, 그 만남은.

05주, 04/02: 페미니스트 활동가와의 만남, ‘나는 어떻게 기독교인이자 페미니스트가 되는 중인가.’
(특강) 홍혜은님. 엘리사벳이라는 세례명을 갖고 있는 성공회 신자, 작가, 페미니스트. <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해>, <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공동 저자.

06주, 04/09: 우리가 다르게 생각하는 지점들, ‘페미니즘과 기독교는 어디까지 함께할 수 있을까’.

07주, 04/16: 기독교와 페미니즘, ‘임신중단권’을 중심으로.

08주, 04/23: 독서보고서 제출, 지정 도서 중 선택.

09주, 04/30: 임신중단권 활동가와의 만남, ‘나는 왜 임신중단권을 위해 싸우는가.’
(특강) 나영님.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적녹보라 의제행동센터장, 성과 재생산 포럼 연구위원.

10주, 05/14: 우리가 다르게 생각하는 지점들, ‘기독교인은 임신중단권을 위해 싸울 수 있을까.’

11주, 05/21: 레즈비언 활동가와의 만남, ‘나는 어떻게 기독교인이자 레즈비언일 수 있는가.’
(특강) 홀릭님.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대표, 한국퀴어영화제 집행위원장.

12주, 05/28: 기독교와 퀴어, ‘다양한 성’을 중심으로.

13주, 06/04: 우리가 다르게 생각하는 지점들, ‘퀴어와 종교는 어디까지 함께할 수 있을까.’

14주, 06/11: 사회와 교차하고 연동하는 종교. 성공회가 걸어온 길 (공통)

15주, 06/18: 쟁점으로 만나는 그리스도교, 수업을 마무리하며.

* 수업목표: 종교가 ‘정의와 사랑에 근거한 기억과 연대’가 아닌 ‘가진 자들의 지배 담론과 폭력’으로 오해되어 전해지고 있다. 이를 조장하는 근본주의적 종교에 의해, 사람들에게 왜곡된 종교의 이미지가 자리 잡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교 또한 마찬가지다. 이에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근본주의적 그리스도교와 ‘보편적 종교성’에 근거한 합리성과 신비를 갖춘 그리스도교를 비교하고 토론하며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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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8/04/09 03:11 2018/04/09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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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를 통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듣고 보고 만집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우리 함께 2독서 가운데 한 구절을 읽어봅시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보았습니다.” (1요한 1:1b)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이 끝까지 ‘육체의 부활’을 포기하지 않는 건, 우리 신앙이 정신적 차원이나 선언적 차원에 머무는 게 아님을 굳게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부활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여러분과 저 그리고 우리 이웃의 현실이 어떠하든 정신승리만 맛보면 되는 정신적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 일상과 아무 상관없는 멋진 주장이나 현학적인 얘기만 던지면 되는 선언적 차원과도 다릅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육체로 나타나셨음을 믿는다는 건, 2018년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은 우리가 이 땅에서 부딪히는 물질적 차원에까지 단단히 자리 잡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의 하느님,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부활하신 육체로 우리 가운데 다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육체는 과거의 육체나 지금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육체가 아닌 신비한 육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물리적인 벽이나 닫힌 문을 지나 제자들 앞에 나타날 수 없죠.

그러므로 우리가 육체의 부활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을 할 때에 이것은 ‘단순한 육체의 부활’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이는 신비한 육체의 부활, 이 땅에서 작동하는 물리적이고 과학적인 조건에 갇히지 않은 신비한 육체의 부활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교회의 스승인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함께 읽어봅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평화’는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킵니다 ...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는 당신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 이를 온갖 축복으로 채워주는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요한 복음 주해> 12,1.,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Ⅵ>, 520쪽.

이처럼 교회의 스승들은 ‘신비한 육체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신앙 공동체와 신자들의 삶 가운데 이뤄지는 ‘하느님의 평화’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의 평화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참여해, 그 신비한 몸의 일부가 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성령의 온갖 축복을 뜻했습니다.

그래서 2018년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이와 같은 신비한 육체의 부활을 마주한다는 건, ‘평화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마주하고 동행한다는 의미입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이 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실이냐 아니냐’는 문제가 핵심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2독서인 요한의 첫째 편지 말씀처럼 어둠이 아닌 빛 가운데서 살 때, 비로소 ‘빛이신 하느님과 사귐’ 가운데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를 사는 존재들이 됩니다.

우리 함께 2독서 가운데 몇 구절을 읽어봅시다.

“만일 우리가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하느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좇아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가운데서 살고 있으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줍니다 ...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친히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1요한 1:6-7, 2:2)

여기서 ‘제물’이란 상징은 ‘평화의 통로’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분이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에게 나타나 당신을 드러내실 때에 하신 말씀이 바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입니다(요한 20:19).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비한 육체로 부활하여 우리 가운데 오신 건, 우리에게 이런 평화를 주기 위해서이고 또한 우리가 그런 평화의 통로가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성서는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해 평화의 통로가 되는 순간부터 우리에게 누구의 죄든 사해주거나 저주를 선고할 수 있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 함께 교회의 스승인 봅수에스티아의 테오로루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어봅시다.

“사도들이 성령을 통해 이룰 다른 많은 일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가장 핵심적인 것만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너희가 원하는 이의 죄를 사해 줄 수 있으며 누구에게든 저주의 선고를 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
- 테오도루스 <요한 복음 주해> 7,20,22.,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Ⅵ>, 525쪽.

부활 이후를 사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일들은 우리들 안에서부터 이뤄집니다. 우리들의 믿음으로 시작됩니다. 우리 이웃들과 이 세계는 우리를 통해 이런 놀라운 일을 봐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스승 중 한 명인 요한 크리소스투무스의 이야기를 함께 읽어봅시다.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임을 사람들이 믿도록 하기 위해 부활 전에 많은 표징이 일어날 필요가 있었듯이, 부활 이후에도 그분께서 되살아나셨음을 그들이 인정하도록 표징이 필요했습니다. 요한이 “제자들 앞에서”라는 말을 덧붙인 또 다른 이유는 부활 이후에는 예수님께서 그들과만 말씀을 나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요한 14:19)이라고 하셨습니다.”
-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요한 복음 강해> 87,2.,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Ⅵ>, 543쪽.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의 그리스도와 동행함으로 신비한 육체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듣고 보고 만집니다. 우리가 평화의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위한 길에 참여할 때, 우리 이웃과 이 세계는 우리를 통해 신비한 육체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듣고 보고 만집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친히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1요한 2:2)

교회와 성서는 우리를 위해 친히 제물이 되신 예수, 우리를 위해 친히 ‘화해의 통로’가 되신 예수님이 온 세상을 위한 화해의 통로가 되시는 분을 믿고 증언합니다.

그런 주님은 우리와 온 세상을 위한 평화와 생명의 통로이므로 우리가 ‘신비한 육체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건, 바로 평화와 생명의 통로인 예수 그리스도를 딛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시대에 신비한 육체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한다는 건, 바로 ‘평화와 생명의 그리스도’와 이어져 그를 통해 온 세상이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1독서를 보면 우리 평화이자 생명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 우리보다 앞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어떻게 서로를 통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듣고 보고 만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함께 오늘 1독서를 읽어봅시다.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며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신도들은 모두 하느님의 크신 축복을 받았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고 저마다 쓸 만큼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 (사도 4:32-35)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그 교회를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존재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가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이 역할은 그 누구에게 미룰 수 있는 부르심이 아닙니다. 오직 부활 이후 신앙을 사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게 주어진 부르심입니다.

신비한 육체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몫이며 부르심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 신앙의 앞선 이들과 교회가 자신들의 한계 가운데 살아보려고 애쓴 부활을 지금 우리도 살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나요? 그렇게 하지도 못하면서 ‘부활이 실제적이냐 역사적이냐 과학적이냐 선언적이냐’를 논하는 건 우리 이웃과 이 세계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지금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부로 그 부활을 살아냄으로 우리 이웃과 이 세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듣고 보고 만져볼 수 있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서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듣고 보고 만지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잠시 묵상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멘.

“다시 말해, ‘나는 주인의 권한이 아니라 너희를 사랑하는 이의 마음으로 너희를 보낸다. 나는 너희가 모든 이를 위하여 배고픔을 견디고 무거운 쇠사슬과 지저분한 감옥의 괴로움을 겪고 온갖 형벌을 받고 죽임을 당하도록 너희를 보낸다. 인간의 마음에 이 모든 일을 명하는 것은 권한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뜻입니다.”
- 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설교집> 84,6.,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Ⅵ>, 523쪽.

* 본기도
부활하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오시어 평화를 전해 주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에게도 새 생명의 기운을 부어 주시어 부활의 소망과 믿음을 온 세상에 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1독서, 사도 4:32-35 / 2독서, 1요한 1:1-2:2 / 복음, 요한 20:19-31

* 2018년 4월 8일, 부활 2주일(Second Sunday of E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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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8 15:40 2018/04/08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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