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떤 사안에 대해서 개입이나 연대하는 글이나 발언을 할 때에 신중하게 고려하는 게 몇 가지 있다.

첫째, 내가 모든 걸 다 알 수 없고 항상 옳을 수는 없다. 객관적 중립, 그런 거 정말 어렵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둘째, 내가 글을 쓰거나 발언하기 전부터 그곳에는 ‘사람’이 있었다. 내 글이나 발언 이후에도 그곳에는 사람이 있다. 내가 연대하거나 개입하는 건 일부나 순간이지만, 내 글이나 발언이 영향을 주는 건 ‘한 사람의 삶과 일상’이다.

셋째, 현장의 언어를 사용하든 학문적 언어를 사용하든, 꽤 많은 논쟁의 장에서 나보다 앞선 이들이 있다. 그리고 내가 연대하거나 발언하기 전부터 그곳엔 논쟁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거다. 나는 일부나 순간을 포착했을 뿐이다.

넷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개입하거나 발언할 때엔 그만큼 책임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난 의미있는 한 마디를 던졌으니, 나머진 그대들 몫입니다’ 라는 태도나 입장은 객관적인 게 아니라 무책임한 경우일 때가 더 많다.

늘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계속 긴장하며 되돌아본다. 나와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 묻고 듣는다.

* 덧. 그러니 책임지거나 감당할 생각이 없다면, 내지르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보자. 내 글이나 발언이 누굴 짓밟고 있는 건 아닌지.. 제발 쫌..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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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0 04:31 2017/06/10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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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현장

‘현장’.

나는 아직도 너무 부족해서 쉽게 말을 내뱉고 자주 흥분하며 툭하면 지친다.

그런데 내 주변에서 한 자리를 아주 오랫동안 지켜온 분들을 보면 반대인 경우가 많다. 말은 신중하며 듣기를 즐기고, 그럴 만한 일에 격노할 지언정 쉽게 흥분하지 않으며, 지치기 전에 큰 숨 한 번 쉬며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런 분들 입에서 ‘현장’이란 두 글자가 나지막이 내뱉어지면, 나는 순간 얼어붙는다.

그 말의 무게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분들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그 현장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풍기는 짙은 ‘삶의 냄새’가 나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들과 연대하는 자리에서 잠시 물러서 쉴 수는 있어도 떠날 수는 없다는, 입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결기’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현장. 내가 다 담아낼 수 없는, 그럴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긴 호흡으로 동행하며 살펴도 항상 부족한, 가장 묵직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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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7/06/10 04:26 2017/06/10 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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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과 동행하는 삶. 각 시대와 사회에서 다양한 형태와 맥락의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 삶.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그 일을 위해 부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꼭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요? 제가 보기에 신부님은 아프리카 사람들보다 충분히 부유한데요? 아니면 한국 평균을 말하시는 건가요? 아, 그럼 계속 가난하게 살아야 하시겠네요. 쉽지 않을 텐데요..”

별 웃기지도 않는 소리하고 있다. 제발 제대로 좀 알고 비아냥거렸으면 좋겠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성서와 교회 전통, 이성의 안내를 따라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과 동행하고 연대한다는 이야기. 그 말은 앞으로도 쭈~욱~ ‘빈곤선’ 아래에서 산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 땅의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빈곤선을 벗어나겠다는 의미다.

우리 모두가 ‘사람답게 더불어 사는 세계’로 나아가는 일에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기여하는 게 중요한 ‘부르심’이라는 뜻이다. 그게 성서와 교회 전통, 이성이 안내하는 ‘하느님의 뜻’이란 말이다.

계속 빈곤선에 머물고 싶다면 그건 당신의 선택이니 그리 하시라.

헌데, 내게 그걸 강요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빈곤 코스프레’할 생각이 없다. 더군다나, ‘고통의 전시’를 통해 내 신앙과 운동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생각은 더 더욱 없다.

그게 당신과 내 신학, 당신과 내 해석의 차이다.

——————


* 덧 1. 참, ‘사람답게’를 넘어, ‘생태적인 조화 가운데’를 이야기한 지도 한참이다. 아직 내게는 어려운 숙제나, 나는 우리가 그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 덧 2. 큰 따옴표 안에 있는 말은 내가 들었던 비슷한 비아냥 몇 가지를 묶은 거다.

* 덧 3. 아플 때에 아프다고 소리치는 것과 의도적인 고통의 전시는 분명 다르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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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0 04:24 2017/06/10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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