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관계와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대한성공회 교회력으로 연중 6주일인 오늘은 ‘병자들을 위한 기도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에서 다양한 이유로 아프고 그로 인해 버림받은 존재처럼 살고 있는 이웃들을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여러분, 몸이나 마음이 아프면 우리는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요?

자의든 타의든 대부분 관계나 사회, 일상으로부터 격리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오래될수록 깊은 무기력함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성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함께 레위기 13장 45절에서 46절까지 읽어봅시다. 여기에 한글성서에서 ‘나병 또는 문둥병’이라고 옮긴 ‘악성 피부병 환자’에 대한 이스라엘 사회의 지침이 적혀있습니다.

“악성 피부병 환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윗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쳐야 한다. 병이 있는 동안은 그는 부정을 벗지 못한다. 부정하니만큼, 그는 진지 밖에 자리 잡고 따로 살아야 한다.”

레위기 13장에서 악성 피부병 환자는 ‘부정한 존재’로 낙인찍힙니다. 그리고 ‘진지’, 그러니깐 이스라엘 사회에서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울타리 바깥으로 쫓겨났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스스로를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큰소리로 자백해야 했습니다. 낙인찍혀 격리되는 것도 모자라, 자기 스스로를 부정(不淨)한 존재라고 검열하며 부정(否定)하는 짐을 짊어져야 했던 거죠.

그런데 이들은 왜 그토록 무서운 악성 피부병에 걸리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성서가 기록된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약적으로 과학과 의술이 발전한 현대 사회에도 제대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은 수두룩합니다. 그 때문에 원인을 잘 알 수 없는 병에 걸린 많은 환자들은 스스로를 탓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고대 사회는 더 나쁜 상황이었습니다. 심지어 원인을 잘 알 수 없는 병에 걸린 사람들은 ‘어떤 저주’를 받은 사람으로 인식되기 쉬웠습니다.

환자 스스로도 자신이 저주받을 만한 일을 했거나 신이 버린 사람이라는 절망 섞인 자기 검열과 부정, 깊은 무기력함에 빠졌습니다.

오늘 1독서인 열왕기하 5장에 기록된 시리아 군사령관 나아만이 겪은 치유 이야기에서도 비슷한 패턴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악성 피부병 환자였던 나아만은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아 아내의 하녀로 삼은 한 소녀의 이야기를 듣고 이스라엘로 찾아와 자신의 악성 피부병을 치유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그가 당장 뛰어나와 자신의 병을 살펴보리라고 기대했던 이스라엘 예언자 엘리사의 반응은 그를 화나게 했습니다. 성서는 나아만의 분노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적어도 그가 나에게 나와서 자기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부분을 손으로 만져 이 나병을 고쳐주려니 했다. 이럴 수가 있느냐?” (열왕상 5:11b)

그 당시 강대국인 시리아 군사령관이었던 나아만은 이스라엘 예언자 엘리사가 직접 나와 엘리사가 믿는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부르거나, 병든 부분을 직접 살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그 신들 중 하나인 이스라엘의 신에게 자신의 병 낫기를 청해줄 예언자가 자신을 각별히 살펴주기를 기대했던 겁니다.

그는 왜 이토록 간절히 다른 신을 섬기는 예언자에게 기대하며 매달렸을까요?

그가 뛰어난 군사령관인 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성 피부병 초기라도 아직은 시리아 왕 앞에 나설 수 있을 만큼 총애 받는 존재더라도, 병이 더 심해지면 그도 곧 모든 관계와 일상을 잃고 사회로부터 격리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리 대단한 개인일지라도, 그가 속한 세계와 사회에서 ‘낙인찍힌 존재’의 삶은 무기력하고 비참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이쯤에서 교회의 스승 중 한 명인 시리아인 에프렘의 가르침을 함께 읽어봅시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미셨을 때 율법은 폐기되었습니다. 율법은 나병 환자를 만지는 사람은 불결해진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병 환자를 만지신 것이 아니라, 거룩함으로 가득한 당신 오른손을 건네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율법에 반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그분은 나병 환자의 부족함을 채우시어 본성은 선하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 나병에 관해 수많은 율법 규정이 있었지만 어떤 결실도 맺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당신 말씀으로 치유하셨고, 나병과 관련된 율법을 폐기하셨습니다.”
- 시리아인 에프렘 <타티아누스의 네복음서 발췌 합본 주해>12,24.,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Ⅲ>, 85쪽.

시리아인 에프렘은 “나병 환자의 부족함”에 대해 말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부족한 걸까요?

그것은 바로 관계나 사회, 일상으로부터의 격리로 인해 ‘잃어버리게 되는 것들’이 아닐까요? 그 가운데 겪게 되는 절망적인 자기 검열과 깊은 무기력함으로 인해 ‘부정하고 잃어버리게 된 자신’이 아닐까요?

한 사회가 어떤 존재를 낙인찍어 비하하고 혐오하며 배제하기 시작하면 그는 절망적인 자기 검열과 깊은 무기력함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관계와 일상 가운데 심각한 폭력을 경험한 사람, 반복적인 폭력에 경험한 사람들도 비슷한 모습을 보입니다.

결국 크게 부족할 것 없는 사람도 스스로를 ‘부족한 사람’으로 여기게 됩니다. 주님이 피부병 환자에게 손을 내미신 건, 바로 그 부분을 만지신 겁니다.

그 행위를 통해 ‘당신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 당신을 그렇게 만든 이 세계와 사회가 문제다. 이제 당신은 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나와 같은 존재로 살아가자.’ 라는 선언과 치유를 시작하신 겁니다.

그로 인해 과거에 존재하던 여러 문제와 위협으로부터 이스라엘 사회를 지키기 위해 구성된 여러 율법들의 유효 기간이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를 디딤돌 삼은 새로운 사회로의 초대가 시작되었습니다.

한 사회와 관계에서 ‘부족한 사람 취급받던 사람들’을 그 사회가 낙인찍고 배제하지 않는다면, 실상 그는 아무 문제나 부족함 없이 똑같이 ‘선한 존재’라는 걸 확인하게 된 겁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란 관계와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런 주님의 치유를 계속 이어간다는 건, 오늘날 우리 가운데 있는 관계와 일상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돌려주는 선언이자 행동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받을 상은 이 세상에서 주는 상과 다르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얻으려는 “불멸의 월계관”은 이 세상이 약속하는 “썩어 없어질 월계관”과 다르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1고린 9:25).

그 불멸의 월계관은 다름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하느님을 품은 존재들’이 그 선함과 존귀함 그대로 존중받으며 살 수 있도록 선언하며 행동할 때 얻게 될 상입니다.

“당신은 나의 통곡하는 슬픔을 춤으로 바꿔주시고 베옷을 벗기시고 잔치옷으로 갈아 입히셨사옵니다. ”라는 오늘의 시편 30편 11절 말씀을 기억합시다.

우리 안팎에 있는 이웃들을 돌아봅시다. 그 가운데 부당하게 낙인찍혀 신음하고 있는 ‘하느님의 숨결이 깃든 모든 사람들’의 통곡과 슬픔이 춤으로 바뀌는 날을 위해 살아갑시다.

그들의 베옷이 잔치옷으로 바뀌는 날을 위해 달음질하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됩시다.

우리 모두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잠시 묵상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멘.

*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어 병든 이들을 고치시고 버림받은 이들을 돌보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나눔과 섬김을 통해 어려움 속에 있는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1독서, 열왕하 5:1-14 / 2독서, 1고린 9:24-27 / 복음, 마르 1:40-45

* 2018년 2월 11일, 연중 6주일(Last Sunday after the Epiph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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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4 05:55 2018/02/14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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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2월 9일에 끄적인 글.

‘보수적인 개신교계의 집단 항의’.

참으로 멍청한 선택이다. 잠깐만 입장 바꿔 보기를 해 봐도 답이 나온다.

이슬람국가에서 세계적인 스포츠 행사가 진행된다는 가정을 해 보자. 그곳에서 소수파인 ‘개신교 기도실’에 대한 계획을 세워질 경우, 그때 보수적인 무슬림들이 ‘개신교의 공격적인 포교 활동에 빌미를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한다면, 이번에 극렬 반대했던 보수적인 개신교계 집단은 대체 뭐라고 말할 건가.

기사에서 얘기된 보수 개신교계가 내가 아는 극우 개신교계라면, 그때 ‘종교 자유 탄압하는 이슬람의 실체’ 운운할 확률이 높지만 이건 정말 멍청한 선택이다. 어떤 식의 운동이든 금방 부메랑이 될 수 있는 방식은 선택하는 게 아니다.

그걸 알 만한 사람들이면 이런 멍청한 선택을 하지 않겠지만 ㅡ.,ㅡ^

——————

[뉴스1] 올림픽 개최지 강릉 ‘무슬림 기도실’ 개신교 반발에 무산
- 관광공사, 보수 기독교계 반대에 계획 포기 방침
박창욱 기자 | 2018-02-07 15:45 최종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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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4 05:52 2018/02/14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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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나눔] 정치, 뭘까.

* 2018년 2월 7일에 끄적인 글.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 오랜 시간 ‘성평등 실현’에 앞장서 온 것으로 알려진 인물.

최근 그에 대한 여러 소식들이 들려온다. 그는 최근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것은 법무부든 기재부든 교육부든 성평등을 지향하는 젠더 관점이 전체적으로 정책에 녹아들게 하는 게 핵심이다. 성소수자를 포함하느냐 마느냐, 이분법적으로 대립할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최근 ‘한국기독교연합’이라는 보수 개신교회 연합체를 찾아가, 여성가족부가 진행하는 성평등 정책이 동성애를 인정하거나 성소수자를 옹호하는 정책이 아니라면서 이해와 협조를 요청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좀 더 확인할 필요가 있다.)

또한 한기연 대표회장이란 사람은 여성가족부가 “한국 사회 어머니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어.머.니.역.할?!!

이 땅의 정치라는 게, 현실 정치라는 게 그렇다. 더 많은 수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걸 거슬러 가려면 분명한 당위나 설득력, 또는 더 큰 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치라는 게 그런 식으로 ‘숫자 놀음’에 그칠 거라면, 오직 정치공학적 계산으로 이뤄지는 거라면, 사람들은 더 이상 ‘정의나 인권’ 같은 걸 기대하지 않을 거다. 오직 더 ‘많은 숫자’를 모으는데 집중할 거다.

좋은 정치란, 그런 좋은 정치가 자리 잡은 나라란, ‘사회적 소수’이어도 괜찮은 나라, 소수로 존중받으며 또 다른 소수와 공존하고 상생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닐까.

나는 성평등 정책이 성소수자의 존재와 인권을 놓고 이분법적으로 대립할 문제가 아니라는 정현백 장관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내 동의는 ‘성평등 정책이라면 ‘마땅히’ 성소수자의 존재와 인권도 동등하게 존중받도록 구성한다’라는 방향일 때에 유효하다.

왜냐하면 제대로 된 성평등 정책이 구성되고 진행되려면 ‘이성애-가부장제도와 관계’를 건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적당히 피하면서 성평등 정책을 얘기한다는 건, 말 그대로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다.

그러니 성평등을 말하면서 사회적 소수자인 성소수자의 존재와 인권은 ‘나중에’라는 식으로 접근한다면, 그건 그저 ‘부적절한 정치적 타협’일 뿐이다. 누군가의 존재와 인권을 ‘부적절하게 타협’할 수 있는 나라는, 분명 좋은 나라가 아니다. 좋은 정치는 더 더욱 아니다.

더 이상 존재 자체를 삭제하거나 부정하지 말라는 신음 소리. ‘나의 성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을 당신들에게 ‘허락’받거나 ‘승인’받을 이유가 없다. 나는 당신들이 함부로 ‘가짜’라고 말할 수 없다!’ 라는 외침.

이런 신음 소리와 외침을 ‘부적절한 정치적 타협’으로 해결하겠다는 입장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죽어가는 자의 신음 소리와 얻어맞아 숨이 넘어갈 듯 외치는 소리가 도시마다 사무치는데 하느님은 그들의 호소를 들은 체도 아니하시네.” (욥 24:12)

이 밤, 욥의 탄식이 오늘따라 내 맘을 깊이 찢는 것만 같다. 이 밤, 그의 탄식이 나의 기도와 같기 때문이다.

——————

[경향신문] 정현백 여가부 장관 “화해·치유재단 올해 안에 청산”
구정은 정책사회부장 최미랑 기자 | 수정 : 2018.01.23 07:13:15

[뉴스앤조이] 여가부장관 한기연 방문, ‘성평등’ 용어 해명
- 청소년·가족 복지 분야 협조 부탁
구권효 기자 | 승인 2018.02.02 17:56

[기독일보] 여가부 장관 “성 평등 정책, 동성애 인정하거나 성 소수자 옹호와 무관”
박용국 기자 | 수정: 2018. 02. 05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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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4 05:47 2018/02/14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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