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 총체적 난국

총체적 난국.

본의 아니게 이런저런 현장에서 꽤 실무를 맡다 보니 어떤 제안을 들으면, ‘어떤 철학에 근거해서, 누가,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어렵더라도 이 부분에 대한 답을 함께 찾을 수 있다면, 그 제안이나 이야기에 적극 동참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리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는 식으로 툭 던지듯이 나오는 얘기라면 거리를 둔다.

‘어떤 철학에 근거해서, 누가, 어떻게’.

철학이 없으면 오래 못 가서 변질된다. 누가 그 일을 할 지 떠오르거나 명확해지지 않으면, 또 다른 형태의 책임 전가가 되기 쉽다. 어떻게 해야 할 지 섬세하게 말할 수 없다면, 말 그대로 ‘좋은 얘기 한 번 더’ 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현장과 실무를 아는 사람아면, 이 세 가지는 꼭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만 없어도 일이 삐걱거린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모두 잘 모르거나 당장 말할 수 없다면, 그건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총체적 난국이란 걸 인정하면 된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다시 하나씩 세워가면 된다. 괜히 다 있는 ‘척’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렇게 하면 다시 희망이 찾아올 지도 모른다.

있는 척 하지 않기. 그래서 시간이 걸리고 모두 고생스럽더라도 하나씩 세워가야 한다는 현실을 인정하기.

총체적 난국을 넘어설 수 있는 현실적 방법이 아닐까.

2017년, 2박 3일의 서울교구 성직자 워크숍이 마무리 됐다. 쉬지 못하고 바로 출근했다가, 이제 퇴근.

어떻게든 희망을 맛보고, 그 희망을 나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저.. 아주 조금이라도. 희망이란 녀석이 이 세계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만큼만이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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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7/06/22 04:13 2017/06/22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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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급진’일까. ‘누가 더 고통받는가’를 경쟁시키는 방식에 급진이란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면, 나는 쉽게 동의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역사성이나 맥락은 상관 없는 듯 ‘천상천하 유아독존’ 식으로 떠들고 일하는 급진이라면, 더 더욱 동의하기 어렵다.

나는 정상가족 담론이 강하게 작동하는 사회에서 젊은 나이에 이혼한 엄니가 경험한 고통을 간접 체험했다. 저학력, 젊은 나이, 아들 셋 딸린 이혼녀 가정에서 자란 아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런 낙인이 찍힌 아이는 늘 부끄러움을 끌어안고 살아야 했다. 그런 아이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하는 게 당연한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때론 공모하거나 동조하고 때로는 다양한 저항을 하며 자랐다.

성장하며 여러 만남을 통해서 ‘저학력, 젊은 나이, 아들 셋을 책임지는 이혼한 엄니, 여성’은 죄가 아니란 걸 깨닫게 되었다. 내가 겪은 경험은 결국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 운동에 연대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내가 당한 고통과 부정적인 경험을 또 다른 사람이 겪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 고통과 경험이 곧바로 연대로 이어진 건 아니다. 그 고통과 경험에 대한 ‘저항감’이 연대로 나아가게 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배운 게 있다. 나의 고통과 경험이 다른 누군가의 고통이나 경험보다 우월하거나 떨어질 수 없다. 나의 고통과 경험은 나만의 것이며, 비슷한 고통과 경험을 한 사람들과 이어지는 접속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런 고통과 경험을 오롯이 끌어안고, 내가 쉽게 알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경험을 존중하는 게 중요하다.

나는 알게 되었다. 고통과 부정적인 경험에 대한 ‘저항감’을 기반으로, 다양한 소통을 하고 접속과 단절이 계속되는 연대의 과정이 우리를 강하게 한다. 그 접속과 단절이 이어지는 연대를 통해 얻어지는 ‘작은 승리의 기쁨들’이 우리를 계속 나아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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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7/06/11 01:52 2017/06/11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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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영역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일하는 경험이 쌓일수록 무서워지는 말이 하나 있다.

“저 사람은 말이 통해요.”

내가 지금 그와 비슷한 입장이든 아니든 그 사람과는 소통이 된다는 말. 오해나 어긋남이 생기더라도, 최소한 서로에게 말은 걸어볼 수 있다는 의미.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일수록 불필요한 적이 적다. 그리고 그와 직접적인 이해 관계가 얽히지 않았는데도,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많다. 무엇보다 그 사람이 하는 말에 신뢰를 갖고 경청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과 분명하게 선을 긋고 ‘다른 입장’을 말해야 할 때가 있다. 그 순간엔 정말 수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그때마다 매번 똑같은 선택을 했던 건 아니다. 매번 좋은 결과로 마무리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분명하게 배운 게 하나 있다. “저 사람은 말이 통해요.” 라는 말을 듣는 사람은 늘 상대방 입장에 맞춰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근거가 분명한 일관된 입장을 가지고, 자기가 어떤 자리에서 말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며, 정직한 질문에는 정직하게 답변하는 사람이었다.

나와 입장이 비슷하든 아니든,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저 사람은 말이 통해요.” 라고 인식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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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7/06/11 01:50 2017/06/11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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