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전통 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아쉬운 흐름이 있다면, 이른바 “성사적 사회주의”(Sacramental Socialism)라 이름지어 부를만한 성공회의 그리스도교 사회주의 전통이라 하겠다. 이것이 프레데릭 모리스(F.D. Maurice)와 같은 광교회 전통에서 시작되어, 이후 성공회 가톨릭주의(Anglo-Catholicism)의 일군에게로 이어졌을 때, 말그대로 “성사적 사회주의”라는 말이 성립된다. 그 연장 선에 윌리암 템플(William Temple)이나 마이클 램지(Michael Ramsey)와 같은 캔터베리 대주교들이 있었다는 것이 작은 위안이고, 희미하게나마 로완 윌리암스(Rowan Williams) 현 대주교에게도 이어지는 것은 다행이다. 이런 흐름이 희미해지고 주목을 끌지 못하는 처지에 콘라드 노엘(Conrad Noel)과 이 운동을 미국으로 옮겨준 헤이스팅스 스마이스(F.Hastings Smyth)까지를 되돌아 보자고 하는 것은 참으로 가상한 일이 되고 만다. 케네스 리치(Kenneth Reech)가 여전히 분투하고 있나?

지난 관구장 회의에서 주교들이 잔지바르(Zanzibar) 주교좌성당에 방문한 것은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곳 성당은 노예 시장터에 위에 노예제 폐지를 기념하고, 노예로 팔려간 아프리카인들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졌다. 제대는 바로 노예들이 사슬에 묶인 채 경매되었던 바로 그 자리에 자리잡았다. 교회 건축과 공간 배치에서 전통적으로 제대는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 십자가를 제대 위에 매달아 배치한 것을 되새겨 보면, 잔지바르 성당 자체는 근대사 속에서 새롭게 이해되는 고난과 구원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그런데도 그곳에 드린 성찬례에서 성찬을 나누지 않은 주교들은 몰신학과 몰역사 이해의 증인들로 뼈아프게 기억될 것이다.)

이 잔지바르 교구에 프랭크 웨스턴 주교(Bishop Frank Weston:1871-1924)가 있었으니, 그는 이 “성사적 사회주의”의 전망과 실천의 단면을 분명하게 표현한 적이 있다. 1923년 런던에서 열린 “성공회 가톨릭 대회”의 폐회 설교의 한 부분이다. 제목은 “오늘 우리의 사명”이다.

여러분이 교회를 위하여 싸울 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서 싸우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성체를 모신 성막을 지켜내려는 것은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진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런 다음 재일치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위대한 진리가 있으니, 그것은 그리스도는 물질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물질을 통해서, 하느님을 육체 안에서, 하느님을 성체 안에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여러분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면, 여러분은 이제 여러분의 성막을 나와, 여러분 안에 신비하게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세상의 거리로 걸어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도시와 마을 사람들 안에서 같은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빈민촌에 머무시는 예수님에 대한 측은지심이 없이는 여러분은 성막에 있는 예수님을 예배하노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의 사명은 이것입니다… 나가서 누더기를 걸친 사람들 사이에서, 헐벗은 이들 사이에서, 억압받는 이들과 저임금에 찌든 이들 안에서, 희망을 잃은 사람들 속에서, 그리고 옳은 일을 위하여 싸우는 이들 안에서 예수님을 찾으십시오. 예수님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만나거든, 그분의 수건을 여러분의 허리에 메고 그들의 발을 씻겨 주십시오.

Frank Weston, “Our Present Duty” Concluding Address, Anglo-Catholic Congress, 1923, with a foreword by Sidney Dark (London: Society of Ss. Peter and Paul, nd.)
via http://anglicanhistory.org/weston/weston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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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February 20th, 2007

성찬례에서 실제로 봉헌되는 것은 무엇인가, 누가 이 봉헌을 드리는가? 중세 말의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은 간단 명료한 답을 제공한다. 사제가 그리스도를 봉헌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 역시 간단 명료한 답을 제공한다. 예배자들이 봉헌한다 - 첫째로 찬양을 드리고, 그 다음 예배자 자신을 드린다는 것이다. 봉헌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전체를 위해 단 한번 스스로를 봉헌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분의 봉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봉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답변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일치되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성 어거스틴은 이러한 부조화를 넘어서서 완벽하리만치 자연스럽게 이처럼 말한다.

“구원된 공동체 전체, 즉 교회와 성도(성인)들의 공동체가 대사제이시며 우리를 위해 종의 모습으로 그 자신을 봉헌하신 분을 통하여, 희생제물로 하느님께 봉헌된다. 이로써 우리는 위대한 머리이신 분의 몸이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희생제사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제대의 성사를 축하하는 것이며, 모든 신자들이 아는 바와 같이 교회는 봉헌된 교회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다.” (De Civ. Dei, X. vi)

사제가 그리스도를 봉헌하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봉헌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 전체(the whole Christ), 즉 머리와 그 구성원 전체를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에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성찬례의 의미이며, 이것이 성찬례를 개정할 때 구체화도록 해야 할 내용이다.

E.L. Mascall, The Recovery of Unity (London: Longmans, 1958) 14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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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3 04:10 2007/03/13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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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성공회? - 그리스도인의 증인됨과 선교


여성 수좌주교의 선출이 미국성공회 관구의회의 전체 뉴스거리는 아니다. 다만 차분히 다른 내용들을 짚어볼 만한 여유가 없거나, 요즘같은 자극적인 세상에 선정적인 소재가 우선이 되기에 정작 깊은 내용들은 지나치기가 십상일 뿐이다. 그렇다고 표면에 떠오른 일들을 모두 비껴서 중요한 것이라고 내세운들 관심이나 갖겠는가? 거창하게 말하자면 여기에 어떤 저널리즘의 한 딜레마가 있으려니 생각하곤 한다. 내내 이 블로그가 절반은 이런 저널리즘의 한 부분이겠거니 싶기에 같은 처지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여전히 세계성공회 안에서는 성서와 교리와 전통의 다른 해석에서 비롯된 논란이 줄기차다. 게다가 이것이 교회의 일치와 분열의 문제로 나아가는가 싶다 보면, 그 속내에 자리 잡은 검은 뒷거래와 자본과 권력이 조금씩 드러나기도 한다. 지금 세계성공회를 둘러싼 논쟁은 우리나라의 정치적 혼란과 격투가 실제로 한-미 FTA를 둘러싼 싸움을 통해 보면 좀더 그 속내의 실체가 확연하지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 돈의 흐름과 작금 세계성공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논란은 시간나는대로 한번 소개하고 다뤄볼 생각이다.

어쨌든 미국성공회 관구의회가 끝났다. 그동안 논란이 된 문제에 대한 어정쩡한 결의안도 있었고, 이에 대한 캔터베리 대주교의 여러모로 아쉽기만 한 “성찰”도 나왔고, 논란이나 대화의 진행이 어떻든 제멋대로인 나이지리아 주교의 행동도 계속되고 있는 참이다. 이전과 달리 캔터베리 대주교의 그 “성찰”에 조근조근 반박할 말이 여럿이고, 이른바 보수파를 자처한다는 “글러벌 사우스”의 행태도 절망적이지만, 좀더 근본적인 것에 대한 반성이 없이는 이에 대한 반응도 내내 싸움질 이상은 아니될 것같다는 생각이다.

이 사정과는 상관이 덜하겠지만, 한국의 성공회는 그나름대로 고민이 많다. 교회의 성장도 그 하나겠다. 그리고 이런 세계성공회의 논란이 이 “성장”이라는 눈으로 보자면 참 어처구니없는 광풍이겠다 싶을 것이다. 그러나 앞선 글에서 윌리암 템플 대주교의 경구를 인용하면서 잠시 물었던 것처럼, 한줌밖에 안되는 한국성공회의 존재 이유에 대한 물음과 성찰이 없이는 성장도 발전도, 아니 그 생존 자체도 회의적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내 말을 잠시 뒤로하고, 전직 미국성공회 알래스카 교구장 주교이자, 현재 보스턴 성공회 신학교의 총장인 스티븐 챨스턴 주교 (The Rt. Rev. Steven Charleston)의 목소리를 나누고자 한다. 이 짧은 글이 다만 한국 사회에서 성공회의 존재 이유 찾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의 한 출발이 되고, 우리 교회가 어떤 되지도 못할 교만함이나 값없는 우월감이 아니라 선교적 사명에 따른 진면목에 대한 반성의 한 계기가 되길 바랄 뿐이다. 관심이 있으시다면 찬찬히 씹어 읽어주시기를…


more.. 더 읽으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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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3 03:49 2007/03/13 0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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