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니까 반대합니다.”

올해 처음으로 열리는 ‘인천 퀴어 페스티벌’ 현장을 물리력으로 점거 중인 일부 개신교인들이 들고 있는 손팻말에 적힌 문구다.

그들 중에는 페스티벌 참여자들이나 진행하는 분들에게 저주를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사랑하니까 반대합니다.”

한 번만 생각해보자. 만약 이들이 그리스도교가 상대적 약자나 사회적 소수자인 사회에서 사는데, 그 사회에서 꽤 영향력을 가진 종교 집단 등이 이들을 향해 똑같이 말하고 행동한다면 어떠할까.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특정한 행사를 하려고 하는데, “너희들을 사랑하기에 너희 기독교인의 ‘존재’를 반대하는 거다! 너희들을 사랑하기에 너희들이 믿는 신념을 바꿔주려고 하는 거다!!”라고 한다면 어떠할까.

심지어 물리력을 행사해서 그 현장을 점거하고 참가자들에게 욕을 하거나 심각할 정도로 방해한다면 어떠할까.

소위 ‘순교자의 정신’으로 모든 걸 받아들이고 조용히 물러날까. 아닐 거다. 아마도 온 세계의 기독교인 네트워크를 동원해서 ‘종교 탄압’에 대해 항의할 거다. 더군다나 그 행사가 공격적인 선교 행사 등이 아니라면 더욱 더 강하게 항의할 거다.

그런데 지금 일부 개신교인들과 교회가 그토록 문제가 될 만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더군다나 정식으로 ‘집회 신고’가 된 행사 장소를 물리력으로 점거하고 행사 참여자들에게 욕설과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것도 ‘종교 집회’라고 우긴단다.

“사랑하니까 반대합니다.”

더군다나 이 말이 얼마나 우월감에 쩔어 있는 말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는 듯 하니 더 답답하다. 대체 누가 이들에게 이 땅에 있는 퀴어와 연대자들에 대해 ‘반대할 만한 존재’로 규정할 수 있게 했는가?

퀴어, 그러니까 ‘LGBTQIA+’가 의학이든 사회학이든 어떤 의미든 이 땅에 공존하는 ‘또 다른 성’으로 별 문제가 없다고 하는 여러 근거들은 차고 넘친다. 그런데 무엇을 근거로 이들은 퀴어들을 ‘반대할 만한 존재’로 규정하는가?

오랜 시간 그리스도교 주류 전통에서 그들을 오해하고 정죄한 역사가 있다. 그런데 내가 속한 세계성공회의 몇몇 지역 공동체를 비롯한 세계 곳곳의 여러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그 과거를 뉘우치고 돌이키고 있다.

왜냐면 이들은 ‘신의 뜻과 의지’를 식별하고 해석할 때, 오직 ‘성서 문자주의와 근본주의적 해석’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신의 뜻과 의지’를 통합적으로 경청하고 식별하기에 의학을 포함한 여러 ‘이성적 판단’에 귀를 기울인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이 땅의 보수 개신교회는 우월감에 쩔어 자신들의 ‘신학적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여러 근거들을 못 본 척 한다. 그리고 ‘우리 신학과 신앙 전통은 퀴어에 대해 찬성/반대를 논할 만큼 우월하다’는 헛소리를 내뱉고 있다.

그리고 물리력을 동원하고 온갖 저주를 내뿜는다. 그게 ‘신의 뜻과 의지’라고 굳게 믿는다. 그런 가르침을 전하는 교회 지도자만이 ‘진짜 영적 지도자’라고 주장한다.

지금 ‘인천 퀴어 페스티벌’에서 온갖 혐오와 차별, 배제의 말과 행동을 쏟아내는 일부 개신교인들. 그리고 이런 이들을 묵인하고 침묵하는 대다수 한국 교회와 신자들, 지도자들.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그 우월감과 이를 묵인하는 비겁한 선택이 그들을 ‘신의 반대편’으로 향하게 하리라는 거다.

그들은 우리와 동등하지만 동등한 몫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온갖 혐오와 차별, 배제와 폭력의 말과 행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성서와 교회는 그처럼 우리와 동등하고 독특하나 그 ‘동등함과 독특함’을 존중받지 못하는 이들을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에게 돌을 던지고 있는지 깨달아야 한다. 그곳에서 그 오래 전 “임금”으로 비유되었던 ‘우리들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던지는 돌을 맞고 있다는 걸 알아야만 한다.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자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마태 25:40, 공동번역개정판)

* 오늘 예정된 일정과 집안 일 때문에 인퀴에 함께 하지 못했다. 그곳에서 여러모로 고생하고 있는 길벗들에게 마음 깊은 미안함과 힘찬 응원 그리고 사랑을 전한다. 그 반대편에 서 있는 폭력적인 일부 개신교인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안타까움을 전한다.

(2018.09.08. pm 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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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1 02:24 2018/09/11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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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이 차별”이라는 문장을 봤다. 아, 이 얼마나 명료하고 시원시원한(?) ‘성차별주의자’인가.

“성경이 말하는 여성의 종속성은 한 사람의 ‘여성임’ 즉 여성이라는 존재와 관계가 있다. 이것은 한 여성의 무엇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여성 하와와 창조와 타락에 기인한다. 창조시 부여된 권위의 차이를 ‘평등’이라는 단어로 대체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권위적인 면에서 남녀 간에 차별을 두셨다면 이것을 궁색하게 인격적 동등성 내지 평등성이라고 부르기 것보다는, 차라리 하나님께서 그렇게 차별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더 성경적이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이 차별을 ‘그러나 남녀의 인권은 동등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남녀 평등을 부르짖는 현대 사회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다. 하나님의 질서를 현대 사회가 인간 차별로 부른다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하나님의 질서가 인간의 눈에는 차별로 인식되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인간의 언어를 두려워하여 인권이 동등하다거나 인격이 평등하다는 식으로는 표현하지 않았다.”
- 정훈택, “존재론적 평등성, 기능적 종속성? : 우리의 여성 안수불가 논의에 관하여”, [신학지남] 1997년 가을호(제252호), 251쪽.

이 글은 무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신학대학교인 총신대학교에서 발행하는 [신학지남] 1997년 가을호에 실린 글이다.

“이 글은 본교 재단 이사회의 요청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자발적인 동기가 더 크게 자극했다.” 라고 용자다움을 뽐내며 시작하는 글.

이 글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왜 ‘성차별을 명령하는 존재’인지, 그런 ‘만들어진 신의 이미지’를 추종하는 교회가 왜 ‘성차별주의자’일 수밖에 없는지 절절하게 밝히고 있다.

이 글의 저자는 총신대학교 신약신학 교수이었던 정훈택이라는 사람인데, 그는 ‘성차별을 명령하는 하나님’을 믿고 그런 하나님을 추종하는 ‘성경적인 교회’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 글의 결론에서 이런 주옥같은(?) 문장을 토해낸다.

“우리는 바울 사도의 명령을 목숨을 다해 지킨다고 천명하고서는, 다른 한 편으로는 그것을 무시하면서까지 한국의 상황과 여권의 신장에 맞추려는 이중성을 내보이고 말았다. 여성 안수 문제는 여성의 가르침과 다스림에 대한 권한의 문제이다. 바울 사도가 남성의 머리됨이라는 원리를 사용하여 여성은 남성을 가르치거나 다스릴 수 없다고 설명한 것을 우리는 여성 안수 불가라는 명칭으로 지지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 정훈택, 위의 글, 262쪽.

대체 이런 사람에게 성서신학을 배운다는 건 어떤 걸까. ‘성차별주의자들의 집합소 = 성경적인 교회’라는 말에 “아멘”으로 응답하고 앉아 있었을 그 수많은 총신대학교 출신 신학생과 목회자들은 지금 뭐라고 가르칠까.

저런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 지금도 합동측 교회에서 비슷하게 ‘변주된 헛소리’를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살이 떨려온다.

가슴이 아려오고 슬픔이 저며온다. 신이여, 이 땅의 교회는 정녕 ‘포비아와 차별주의자들을 위한 저수지’란 말입니까.

그리 멀지 않은 21년 전,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던 모든 여성들과 다양한 성정체성을 갖고 살아간 신자들을 위해 잠시 머리 숙인다. 그들이 일방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던 그 수많은 혐오와 차별, 언어와 구조적 폭력을 기억한다. 그 따위 것들 때문에 상처 입었을 그 수많은 이들에게 마음 깊이 사과한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리 변한 게 없는 것 같다는 슬픔을 더하여.

* 이게 비단 총신대학교나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만의 문제일까. 그보다 더 극우적인 성서 해석과 주장을 하는 교단이 넘쳐나는 게 이 땅의 현실이다. 그들보다 열린 성서 해석과 주장을 한다는 교단 안에도 뭐, 쩝.

** 이들은 똑같은 논리를 변주하여 성소수자 길벗들을 비난하고 저주하며 낙인 찍고 있다. 이런 자료들을 읽으며 글을 써야 하는 이 밤이 너무 길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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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8 04:16 2018/09/08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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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결규정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오늘 복음서 말씀이 기록하여 전하는 이야기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논쟁입니다.

복음서 말씀인 마르코의 복음서 7장 1절부터 4절은 이 논쟁이 왜 시작되었는지 설명합니다. 저와 같이 한 구절씩 번갈아가며 읽어봅시다. 제가 홀수 절을 읽고, 여러분이 짝수 절을 읽어주십시오.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께 모여왔다가  2 제자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원래 바리사이파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들은 조상의 전통에 따라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깨끗이 씻었고  4 또 시장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반드시 몸을 씻고 나서야 음식을 먹는 관습이 있었다. 그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았는데 가령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 같은 것을 씻는 일들이 그것이었다.

‘음식을 먹는데 손을 씻지 않고 먹었다.’ 대체 이게 무슨 문제일까요?

요즘 우리에게는 그저 위생 관리의 문제 정도로 다가오니, 성서가 기록하여 전하는 이 논쟁에 대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에 대한 답은 5절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 그 부분을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께 "왜 당신의 제자들은 조상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하고 따졌다.” (마르 7:5)

이 논쟁의 핵심은 단순하게 ‘손을 씻었느냐 아니냐’는 문제가 아니었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강조하듯이 ‘조상의 전통을 따르느냐 아니냐’는 문제가 그 핵심이었습니다.

당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뿐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종교적 열성이 강한 이들에게 조상의 전통인 율법이 가르치는 ‘정결규정을 어떻게 해석하고 지키는가’라는 건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키지 않았던 건 ‘손을 씻었느냐’는 위생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조상의 전통인 율법이 가르치는 정결규정을 지켰느냐’는 문제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조상의 전통인 율법이 가르치는 정결규정을 완고하게 해석해서 지키느냐’는 게 왜 그리 중요한 걸까요?

이는 당시 종교적 열성을 강조하던 이들에게 ‘경건한 삶에 대한 중요한 기준’이 되었고, 이러한 경건한 삶에 참여하고 유지하는 이들만이 ‘이스라엘의 회복’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해석되었기에 중요했습니다.

당시 종교적 열성을 강조하던 이들이 말하는 ‘정결규정을 지키는 경건한 삶’이란 거룩하신 야훼 하느님이 베푸는 은총 안에 머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정결규정을 아무렇지 않게 어기는 행동은 이들에게 매우 ‘불경한 행동’으로 받아들여졌던 겁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앞선 이들이 정한 형식에 몸담고 이를 지켜 행함으로 그들 조상의 전통이 강조하는 야훼와의 동행을 계속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따져 물었던 겁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조상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마르코의 복음서 7장 6절부터 8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저와 번갈아가며 읽겠습니다.

6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사야가 무어라고 예언했느냐?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7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친다.' 했는데 이것은 바로 너희와 같은 위선자를 두고 한 말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

무슨 말일까요? 한 마디로 ‘너희가 조상의 전통이라며 강조하고 지키는 그 규칙이 진짜로 지키고 있는 게 무엇이냐’고 반문하시는 겁니다.

교회의 스승 중 한 명인 리옹의 이레네우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했습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바리사이들은 자기 조상들의 전통이 율법을 보존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모세 율법과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가 "너의 술은 물로 싱거워졌다"(이사 1:22)라고 한 것은, 조상들이 하느님의 순수한 계명을 물 같은 전통과 섞어 버렸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 그들은 물과 포도주를 섞는 부정행위로 하느님의 율법을 거짓으로 꾸몄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법에 맞서 오늘날에도 바리사이법이라고 불리는 그들만의 법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이 법에서 어떤 것은 빼 버리고 어떤 것은 덧붙이며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해석합니다. 그러고는 이런 일을 위하여 자기네 스승들이 꼭 필요하다고들 합니다.”
- 리옹의 이레네우스 <이단 반박> 4,12,1-2.,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Ⅲ>, 162쪽.

예수님은 당신에게 따져 묻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진짜로 지켜야 할 것은 외면하고 자신들의 기준에 맞춰 지켜야 할 것을 만들어 강요하고 있음을 간파하셨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것을 ‘하느님의 가르침’이라고 포장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지키라고 강조한 건 외면하던 이들이 자신들이 만든 걸 ‘조상들의 전통이자 하느님의 가르침’이라고 포장하여 가르치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빌려,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는 그들의 문제를 정확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친다.” (마르 7:6b-7)

그렇다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버린 하느님의 계명이란 무엇일까요?

우리 함께 오늘 2독서인 야고보의 편지 1장 27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 떳떳하고 순수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물론, 당시 종교적 열성을 강조하던 이들이 지켜 행하기를 힘쓰던 정결규정은 ‘정결한 삶을 통해 거룩하신 하느님의 은총 안에 머물기’를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정결한 삶’은 ‘어떤 형식의 기준’을 지키고 머물러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작고 연약한 이들을 돌보고 스스로를 ‘힘과 영향력’이라는 맘몬의 유혹에 물들지 않도록 지키는 삶이 ‘정결한 삶’, 다시 말해서 ‘거룩함에 참여하는 삶’이었습니다.

우리 여기서 오늘의 시편인 시편 15편을 함께 읽어봅시다. 제가 홀수 절을 읽고, 여러분이 짝수 절을 읽어주십시오.

1 야훼여! 당신 장막에서 살 자 누구입니까? 당신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자 누구입니까?
2 허물없이 정직하게 살며 마음으로부터 진실을 말하고
3 남을 모함하지 않는 사람, 이웃을 해치지 않고 친지를 모욕하지 않으며,
4 야훼 눈 밖에 난 자를 얕보되 야훼 두려워하는 이를 높이는 사람, 손해를 보아도 맹세를 지키고,
5 돈놀이하지 않으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지 않는 사람. 이렇게 사는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오늘의 시편인 시편 15편이 기록하여 전하는 노래처럼 야훼 하느님의 ‘거룩한 산’에 머물 수 있는 이들은 ‘그 삶의 선택들이 하느님 앞에서 정직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우리의 전례와 성사의 형식을 어떻게 지키느냐’는 어리석은 질문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 형식이 무엇을 가리키고 무엇을 지키라고 있는 것인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어떤 개신교인들처럼 ‘주일성수’라는 헛된 형식을 만들어, ‘주일성수를 어떻게 지키느냐’를 가지고 논하는 어리석은 잘못을 반복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논박했던 것처럼 형식의 유지만 강조하고 그 안에 담긴 형식을 통해 지키려는 정신과 사람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건 바로 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지켜 행하라고 했던 건, ‘어떤 형식’이 아니라 그 형식을 통해 ‘지켜야 할 사람들’이었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을 지키는 일에는 어떤 보탬도 뺌도 없습니다.

우리, 오늘 1독서인 신명기 4장 1절부터 2절까지 한 목소리로 읽고 오늘 말씀 나눔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너 이스라엘은 들어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가르쳐주는 규정과 법규를 듣고 지켜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선조의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으로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하고 행복하게 살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은 한마디도 보태거나 빼지 못한다. 내가 받들어 너희에게 전하는 너희 하느님 야훼의 계명들을 너희는 지켜야 한다.” (신명 4:1-2)

우리 모두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잠시 묵상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멘.

* 본기도
주 하느님, 주님은 우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시고 양심을 바로 잡아주시나이다. 비오니, 성령의 감화로 주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심을 깨닫고, 큰 영광으로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1독서, 신명 4:1-2, 6-9 / 2독서, 2독서, 야고 1:17-27 / 복음, 마르 7:1-8, 14-15, 21-23

* 2018년 9월 2일, 연중 22주일(Fifteenth Sunday after Pentecost Proper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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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2 08:50 2018/09/02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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