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하느님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일 뿐이다.’

이 고백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교회 바깥에서 속삭이며 핍박받고 투쟁하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다.

내가 몸 담고 있는 성공회에 ‘광교회 전통’(廣敎會派, Broad Church)이나 ‘기독교 사회주의 전통’으로 표현되는 흐름이 있다. 이들은 ‘지금 바로 여기에’ 라는 신앙적 좌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사회와 연동하는 교회’에 대해 깊이 성찰하며, 비틀거릴지라도 조금씩 나아가는 복음을 살아간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의 ‘빈곤과 불평등’과 싸우는 성공회 신자와 사목자들이 있다. 신앙과 상징으로 ‘하느님의 일부’인 교회에 뿌리를 내리되, 그 안에 갇히지 않고 교회 바깥에서도 하느님과 동행하는 이들.

나도 그들 가운데 하나라는 걸, 성공회 신자이자 사제로, 성공회 전통 가운데 하나인 기독교 사회주의 전통에 기대어 있다는 걸 기억한다.

우리 안팎의 다른 전통과 묻고답하며, 논쟁하고 경합하며 좀 더 깊고 넓게 하느님과 동행하고자 몸부림치는 삶. 내게 성공회 신자이자 사제로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Posted by 자캐오

2017/07/18 05:28 2017/07/18 05:28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www.zacchaeus.kr/rss/response/947

[거리] 거리의 사람들

거리에 나가 길바닥 한 켠에서 ‘거리의 사람들’이 되어 버티며 싸우고 있는 분들을 만났다.

그분들 곁에 펄럭이는 깃발이나 현수막. 거기에는 ‘투쟁’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보기에 어마무시한 말들이 써있곤 하다.

하지만 그 말을 가만히 곱씹어 읽어보면, “우리도 당신들처럼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라는 말을 억세게 표현해 놓은 것일 뿐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위태롭게 버티며 싸우고 있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장기투쟁 사업장 분들.

그분들 곁에서 바라보는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 다들 제 나름대로 어려운 일과 무거운 사연 하나씩은 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어디론가로 ‘일하러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 곁에서 함께하다 보면, ‘사람답게 살고 싶다’ 는 말 한 마디가 갖는 무게가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우리들의 하느님은.. 그곳에서 그렇게 말 잃은 존재가 되어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땅에 무언가 끄적거리며 곁을 지키고 있다.

오늘처럼 비 오는 날. 이런 날이면 우리들의 하느님은 거리의 사람들과 함께 비를 맞고 있다. 이 싸움이 언제 끝날 지 아느냐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나를 보고 계신다.

다시 한 걸음, 그 함께하는 한 걸음이 필요한 때다. 이제는 이 길고 긴, 힘겨운 싸움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 덧. 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과 나눔의집협의회 대외협력 담당을 맡고 있다 보니, 내가 일하는 동네 일 외에도 여러 현장에 다녀와야 할 때가 많다. 그때마다 나는 그 곁을 지키고 계신 '우리들의 하느님'을 만난다. 그곳에는 꼭 계셨다. 그렇게 마주친 우리들의 하느님을 기억하기 위해 끄적거려 놓는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Posted by 자캐오

2017/07/12 04:00 2017/07/12 04:00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www.zacchaeus.kr/rss/response/946

성공회 사제로 산다는 것, 이 시대 그리스도교의 사목자나 목회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지향을 놓치지 않으며 살고 있는가. 이 시대를 사는 신자들과 ‘함께-겪음’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진정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존재라는 걸 기억하며 동행하고 있는가.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런 질문을 마주하고 정직하게 답하며 걸어갈 수 있는가. 적당히 ‘그런 척’하며 포장된 권위 뒤에 숨어 사는가.

답하며 살아야 할 것들에 지나치게 눌려 살면 안 된다.

그러나, 마땅히 답해야 할 것들을 모른 척 살아서도 안 되리라.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는 끊임 없이 ‘다르게’ 질문하고 답하며 살아온 ‘앞선 이’이었다.


——————

“… 사도, 예수의 부활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공동의 증인이자 교회가 무엇을 생각하고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인도자는 서로의 삶을 가르는 경계의 벽에 구멍을 내는 그리스도의 삶을 가장 분명하게 선언하는 사람이자 다른 신자들의 기쁨과 아픔을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이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적인 사목의 핵심은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며, 함께 고통을 겪는, 글자 그대로 함께-겪음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도적’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도직은 고대 종교의 위계 질서나 사제 집단의 서열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 그리스도의 사제 또는 사목자가 된다는 것은 훈련받지 않은 대중을 위해 종교적 기술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모두 의지하는, 공동체의 삶이 지닌 뚜렷한 특징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 로완 윌리엄스, <신뢰하는 삶 -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 비아, 150-151쪽에서.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Posted by 자캐오

2017/07/05 03:59 2017/07/05 03:59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www.zacchaeus.kr/rss/response/945

« Previous : 1 : 2 : 3 : 4 : 5 : 6 : 7 : ... 280 : Next »

블로그 이미지

가난, 소외, 여성 & 그 언저리에 함께 하는 무지개빛 성령님...

- 자캐오

Calendar

«   2017/09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Site Stats

Total hits:
286655
Today:
7
Yesterday:
121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