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15일, 부활 3주일. 오후 4시 16분.

성공회 길찾는교회는 ‘안산 화랑유원지 야외공연장(분향소 옆)’에서 진행되는 ‘세월호 참사 4주기 기억예배’에 참여합니다.

온갖 이기심과 잘못된 구조 앞에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하고 살던 우리의 감은 눈을 뜨게 한 ‘세월호 참사’.

우리는 그 아픔과 눈물을 기억하며, 지금과는 다른 세계와 사회를 위해 함께 기도하러 갑니다.

안산합동분향소에서 드리는 마지막 예배입니다.

* 덧. 오후 3시 30분, 해방촌에서 진행되는 길찾는교회 성찬예배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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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8/04/15 14:39 2018/04/15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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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우리가 나눈 음식을 드셨다는 증인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우리, 교회의 스승인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가 오늘 복음서 내용에 대해 해설한 부분을 함께 읽어봅시다.

“그분께서 음식을 드신 것은 죽음에서 살아난 이 몸이 전에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던 바로 그 몸임을 보여주시려는 뜻이었습니다 ... 직접 말씀하시고 손으로 만져 보게 하시고 함께 음식을 드시면서 제자들의 생각을 진정시키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고난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당신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떠올려 주셨습니다 ... 또한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옛 예언자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의 눈도 열어 주셨습니다.”
- 키릴루스 <루카 복음 주해> 24.,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Ⅳ>, 548-549쪽.

우리는 부활주일 이후 계속해서 교회와 성서의 부활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와 성서는 우리가 방금 함께 읽은 키릴루스의 해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떻게 우리들에게 연결되는지에 대해 집중하여 강조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교회와 신자들은 ‘육체적 부활이 기적 같은 사실이냐 아니냐’에 집중하느라 바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런 입장은 교회와 성서가 강조해온 ‘복음’과는 큰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와 성서는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지금 우리 신앙 공동체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바로 지금 나와 어떻게 연관되는가?’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런 질문에 제대로 답하며 살아갈 수 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이웃과 우리에게 ‘복된 소식’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 함께 오늘 1독서인 사도행전 말씀 한 부분을 읽어봅시다.

“베드로는 그 사람들을 보고 말하였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왜 이 사람을 보고 놀랍니까? 왜 우리를 유심히 쳐다봅니까? 우리 자신이 무슨 능력이 있거나 경건해서 이 사람을 걷게 하여준 줄로 생각합니까?” (사도 3:12)

베드로가 한 말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은 지금 어디를 보고 있습니까?” 말 그대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을 보지 않고,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보고 있다는 말인 거죠.

교회와 성서가 ‘기적과 이상한 일들’을 기록하여 전할 때, 초점은 기적과 이상한 일들 그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가? 그 일들을 통해 우리들의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제자들은 무엇을 전하고 싶었는가?’ 라는 게 핵심입니다.

우리, 오늘 2독서인 요한의 첫째 편지 가운데 한 부분을 읽어봅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뵙겠기 때문입니다 ...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올바른 일을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올바른 사람입니다.” (1요한 3:2, 7)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며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육체적이냐 아니냐’보다 더 중요하고 핵심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신 부활 사건과 그 사건이 던져주는 질문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교회와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고 전할 때에 ‘육체 따로, 정신 따로’라고 이해한 적이 없습니다. 교회와 성서는 예수의 정신과 행동을 따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교회가 오늘 복음서에 기록하여 전하듯이, 예수께서 제자들이 드린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신 행동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조하는 복음의 정신’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교회가 기억하고 성서에 기록하여 전하는 그 ‘사랑의 식탁 나눔’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고난과 죽음, 부활과 돌이킴, 온 세계를 향한 복된 소식과 증언하는 삶’을 가르치신 행위는 교회와 성서가 강조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계속해서 지키고 함께 나누는 감사성찬례가 이 둘에 기초해서 이뤄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라고 말합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우리가 계속 함께 나누고 전하는 ‘식탁과 말씀의 나눔’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야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성서가 기억하며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과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나누는 말씀과 식탁의 나눔으로 우리 신앙 공동체 한가운데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참여하는 말씀과 식탁의 나눔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과 이야기에 근거하고 있기에 우리끼리 나누는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이웃과 우리가 속한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과 이야기가 어떤 의미인지 증언하며 살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오늘 2독서 말씀처럼 죄를 짓지 말고 올바른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와 신자들은 죄를 짓지 않고 올바른 사람으로 살며 복음을 전하는 일이 ‘특정 교회나 신앙 공동체’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과 이야기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특정 교회나 신앙공동체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사랑의 식탁을 나눠 언제나 당신의 제자들과 이어져 있음을 보여주시고 ‘하나 됨’을 느낀 그들에게 강조하여 가르치신 것처럼, 모든 민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는 증인이 되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하였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루가 24:47-48)

다만, 이때 우리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는 게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은 오직 ‘하느님의 사랑’으로만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하느님의 사랑은 특정 교회나 신앙 공동체가 독점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성공회가 그 뿌리로 여기고 있는 켈트 그리스도교의 노래 한 자락처럼 우리들의 하느님은 항상 우리보다 크고 넓고 깊고 높으시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느님은 항상 우리 너머에도 계시고 우리보다 앞서 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너머에도 있고 우리보다 앞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과 이야기에 온전히 동참하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나누는 사랑의 식탁과 말씀은 특정 교회나 신앙 공동체에게만 독점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베푸는 큰 사랑을 갈망하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그 큰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요한 3:1)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께서 우리가 나눈 음식을 드셨다는 증인’이라는 고백은, 이처럼 하느님의 큰 사랑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드신 음식과 말씀을 나눠야 한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과 이야기에 근거한 식탁과 말씀의 나눔은 하느님의 큰 사랑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눠져야 합니다. 그 형식과 방식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말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잠시 묵상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멘.

* 본기도
생명의 하느님, 부활하신 주께서 빵을 떼실 때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았나이다. 비옵나니,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어 지금도 세상 속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을 증거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1독서, 사도 3:12-20 / 2독서, 1요한 3:1-7 / 복음, 루가 24:36-48

* 2018년 4월 15일, 부활 3주일(Third Sunday of E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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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8/04/15 10:30 2018/04/15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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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복음주의신학회와 소강석 목사의 새에덴교회라.. 왠지 잘 어울린다.

새에덴교회가 주관하고 한국복음주의신학회가 주최하는 행사.

젠더나 퀴어라는 말만 나오면 비틀린 ‘네오 마르크시즘’ 깔때기를 들이대며 혐오와 배제를 선동하는데 앞서는 소강석 목사가 담임 목사로 있는 새에덴교회. 그곳에서 한국복음주의신학회가 주최하는 ‘다문화와 한국교회’를 주제로 한 ‘정기논문발표회’.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사회와 관계가 되기 위해 다양한 성평등은 꼭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성평등 얘기에는 펄쩍 뛰며 입에 거품 물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인종차별’을 지적하며 ‘다양한 인종의 평등한 권리’를 말할 수 있을까.

별로 기대되지 않는다. 시혜적 용어와 왜곡된 개념이나 오용으로 가득한 논문발표회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합리적 의심’이 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 있을 자리를 잘 알고 식별하는 것도 지식인의 책무 중 하나일 텐데, 이들을 소위 말하는 ‘기독교 지성이나 지식인’이라 부르기 어려울 것 같다. 이들은 그저 ‘학위를 갖춘 지식 장사꾼’ 그 정도로 볼 수밖에 없다.

2018년, 한국복음주의신학회와 소강석 목사의 새에덴교회. 혐오와 배제의 아이콘, 부정확하고 부적절한 개념 오용의 표상. 뭔가 ‘잘 어울린다’는 느낌적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슬프고 답답한 날들이 계속된다.

우리가 발딛고 사는 사회에 도움은 못 되더라도, 최소한 소통과 동행은 가능한 한국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주여.. 속히 와 우리를 도우소서.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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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8/04/15 02:23 2018/04/15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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