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더 이상..

이젠 더 이상

나를 기다리지도
기억하지도
환영하지도 않는 사람을

기다리고
기억하고
기다린다는 것.

수많은 '인연' 중
하나이었을 뿐인 '인연'때문에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Posted by 자캐오

2007/03/31 12:53 2007/03/31 12:53
이올린 태그검색올블로그 태그검색태그스토리 태그검색티스토리 태그검색, 이올린 태그검색올블로그 태그검색태그스토리 태그검색티스토리 태그검색, 이올린 태그검색올블로그 태그검색태그스토리 태그검색티스토리 태그검색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www.zacchaeus.kr/rss/response/30

"인권단체에서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인권이란 것에 대해 최소한의 고민이라도 하고 사는,
  그런 사람이 본 장진 감독의 〈고마운 사람〉에 관한 이야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난 영화에 대해 잘 모른다. 더군다나 일상적으로 쉽게 접하는 상업영화에 비해 진보적 이야기를 담곤 하는 독립영화나 인권영화는 더욱 모르는 편이다. 그런 내게 웃으며 볼 수 있는, 장진 감독님의 〈고마운 사람〉이란 인권영화라는 건 신선했다(감독님이 그걸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러나 그 영화를 보는 내내 오버랩 되는 장면 하나와 가슴을 쿡쿡 찔러오는 아픔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역리의 시대에 순리를 이야기하는 `인권영화'니 불편한 게 당연한 것 아닐까하며 그 불편함을 이해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결코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기엔 그 불편함이 컸다. 웃고 넘어갈 수 없는 폭력 앞에서 떨고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힘겨운 상황에 대해 넋두리하면서 더불어 웃고 즐기며 고문에 대처하는 방법까지 알려주는 `고마운 사람'이라….

(뭐,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는 그 고문관한테 당하던 학생이 고문관을 편들기 해주니, 그 고문관한테 학생이 고마운 사람일 수도 있긴 하겠다만.)

여기서 잠깐 그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불편하게 했던, 그 오버랩 장면과 아픔이 무엇인지 얘기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 듯 하다. 나는 소위 `전교조세대'이다. 그것도 합법화투쟁의 마지막 세대. 그런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엔 소위 독사라고 불리는 학생주임이 있었다. 그는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 출신이라고 했었다. 본인이 생각하는 옳은 길에서 벗어난, 판단력이 부족한 학생들을 사랑의 매로 다스려 돌이키게 하는 것이 `교사의 사명'이라 굳게 믿던 그.

영화에서처럼 `좋은 세상'이 된 지금. `불휘'라는 이름의 소모임에서 토론과 풍물을 함께 하던 벗들과 그 때를 회상하며 얘기할 때, 벗들과 난 소위 지하서클(내가 고딩 때에는 학교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불법으로 활동하던 음성동아리를 이렇게 불렀다.) 때를 회상한다. 당시에 친구들과 난, 낮엔 학교에서 인정하는 합법적인 동아리에서 활동하다가 저녁이 되어야 소모임을 위해 고대 이공대 숲으로 모이곤 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나에게, 나와 `정의의' 학생주임이 동시에 출연하는 몇 편의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 하나. 학교에서 전교조 합법화나 참교육에 관한 유인물이 뿌려지거나 비슷한 일이 일어나면, 교내 알림방송을 통해 우리를 비롯한 몇 명의 `빨갱이' 학생들이 불려졌다. 그리곤 내가 `통곡의 벽'이라 이름 붙인 학생부실 하얀 벽 앞에서 일렬로 세워져선 몇 시간이고 반성을 강요당했다(당연히 아무 이유도 얘기해주지 않았고, 당시에는 어떤 이유도 필요 없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황당한 그런 일을 `정의의 이름으로' 행하던 그 선생님들이나 당하는 우리들이나 그리고 학교의 학생들 모두, 그런 사건에 `희생양'이 필요하단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명씩 옆방으로 불려가 소위 자백을 강요받는다. 당연히 영화의 후반부에서처럼 차분하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저 말 그대로 `개 패듯이' 패는 것이다(영화의 초입에서 잠깐 관객들을 `웃겼던' 장면처럼.). 옆방에 있는 다음 차례의 아이들에게 공포심을 전달하기 위해서이고, 그 공포심을 통해 혹시라도 사건의 주인공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의외로 일은 쉽게 끝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 두울. 그렇게 기다리다가 내 순서가 되었을 때, 나는 학생주임에게 `특별대우'를 받곤 했다. 중학교 시절 총학생회 활동을 했었던 나는, 1학년 학급회의 시간에 총학생회 회의록을 일반 학생들도 알 수 있게 공개해달라는 상식적인 건의를 했었다. 그리고 학급 친구들의 동의를 얻은 그 제안은 반장의 입을 통해 총학생회 회의 시간 때 건의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 주의 주말, 체육시간. 체육활동을 위해 운동장에 정렬하고 있던 우리 반으로 학생주임이 찾아왔다. 그리곤 그 건의를 한 사람이 누군지 호명했다. 별 생각 없이 손을 들고 나간 나. 학생주임 앞에 서는 순간, 눈이 번쩍했다.

이어 "빨갱이 새끼! 누가 그렇게 가르쳤어!"라며, 욕설과 더불어 연거푸 손바닥과 주먹이 날아왔다. 고등학교 1학년이 그냥 서서 버티기엔 쉽지 않은 어른의 주먹질에 나는 쓰러졌다. 그러자 아이들 속에서 부들부들 떨던 반장이 나섰다. "선생님, 그건 저희 반 회의시간에 모두의 동의를 거쳐 건의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친구의 뺨도 곧 빨갛게 부어올랐다.

다시금 쓰러진 나를 향한 독사의 발길질. 그렇게 시작된 매질은 다시 세워서 때렸다가 쓰러지면 발길질 했다가를 반복하며, 운동장 한 바퀴를 돌고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계속 되었다. 그리곤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학생주임 독사. 나중에 알고 보니 연수를 떠나는 길에 들러서 제자의 어긋난 길을 잡아주려 했단다.

너무나도 개인적인, 그 것도 민주화나 해방과 평등을 위해 장렬하게 투쟁하다 옥중에 갇혔다거나, 아니면 일상적인 어느 날 납치당해서 몇 십일 동안 영문도 모르고 고문을 당하다가 간첩이나 뭐 그런 죄목을 덮어썼다는 이야기도 아닌, 80년대 후반에는 일상적으로 있었던 이야기인데 이리도 길게 얘기한 것은 위의 장면들이 바로, 영화를 보는 내내 오버랩 되었던 장면들이었고 나도 모르게 욕지기가 나오게 가슴 한켠을 아프게 했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저항하기 힘든 거대한 권력으로부터의 폭력이란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이유를 들이대면서, 일방적으로 매도당하고 개 패듯이 두들겨 맞는다는 것에 대한 모욕감과 좌절감이 바로 그런 것이다. 당시의 너무나도 일상적인 폭력에 당한 상처가 나에게 아직도 이렇게 남아 있는데, 하물며 나보다 더한 폭력 앞에서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그 폭력 앞에서 무너져 갔던 그 수많은 사람들은 어떠할까.

물론, 그 영화의 플롯이 `민주화'나 `폭력'의 문제가 아니었단 건 알고 봤다. 요즘 한참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비정규직'의 문제를 장진 감독 특유의 감각으로 그려냈다는 어느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영화를 보는 동안, `이건 아니지 않나….'라는 울컥함이 있었음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인권이란 것이 무엇인가? 물론 보편적인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인권이란, 좀더 언저리의 사람과 이야기들을 편들기 하는 것이 인권이다. 그렇지 않은 인권이란 결국 더 가진 자들에게 주는 선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 영화는 불편함을 넘어 불쾌했다.

비정규직의 문제라‥. 그 영화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고문관들이 비정규직이었다면, 그들도 나 같은 이들이 편들기 해야 하는 대상이다. 그런데 그들이 비정규직이란 이유로, 고문관이라는 지점에서 소위 고학력의 학생을 고문하는 것이 합리화되지는 않는다. 영화 속에선 고문관이 "넌 서울대 다니니까 좋은 직장 들어가겠다."라고 부러운 듯 이야기하지만, 장진 감독이 그런 것을 의도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형사의 한 마디. "맞는 것도 힘들지만, 때리는 것도 맞는 것만큼 힘들어." 이런 제기랄! 내가 그 독사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80년대 후반 박봉의 교사직에서, 오직 먹고 살기 위해 나를 선도하던 그 분을 이해하며 "선생님 좋은 세상이 올 거예요. 좋은 세상이 오면, 선생님처럼 학생을 때리는 분들은 고소당하니깐 다른 선도 방법을 찾아보세요." 이렇게 말했을까?!

희화화도 좋고, 색다른 관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도 좋다. 소위 성역이라고 금기시되는 부분을 탈(脫)성역화 하는 것도 좋다. 그런데 최소한, 어쩔 수 없는 아픔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을 아프게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것이 인권을 대하는 또 하나의 태도가 아니던가?

비정규직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폭력을 희화화한다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장진감독님이 좀 심했다 싶다. 앰네스티 한국지부로 온 초대권으로 그 영화를 함께 보고 나온 같은 그룹 회원들 중 한 분이 이렇게 말해줬다. "장진 감독님의 스타일이잖아요. 인간적이고 유머 있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거요."

뭐, 좋다. 인간적이고 유머 있게 이야기하는 것. 그런데 저항할 수 없는 폭력 앞에서 떠는 한 사람의 인권이, 비정규직 고문관의 문제 앞에선 인간적이고 유머 있게 이야기해도 되는지에 대해선 아직도 동의가 안 된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서, 세상을 너무 심각하게 살지 말라고 얘기하는 사람들한테는 이렇게 묻고 싶다. 우리가 자주 보는 TV에서 가끔 장애인이나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을 소재로 해서 개그나 코미디를 할 때, 장애인들이나 이주노동자들이 껄껄거리고 웃는 것을 본 적이 있냐고. 오히려 웃으라고 하는 이야기에 그들은 울지는 않느냐고.

그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울고 싶었다. 내가 보고 있는 영화가 인권영화가 아니라 일반적인 상업영화이었다면, 그 정도의 눈높이에서 뭐가 더 나올 수 있겠냐고 이해해 보려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보고 있던 영화는 분명히 인권영화였다.

우리가 편들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권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만든 영화가 아니던가? 꼭 심각해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편들어야 하는, 그런데 제대로 편들지 못해서 상처를 가지고 있던 사람의 상황을 희화화해서 그 사람의 관점으로 다른 약자를 편든다는 것. 참 좋은 것일 수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겐 너무나도 이상적이고 참으로 계몽적으로 다가왔다.

인권영화이니 이상적일 수는 있다고 치자, 그렇지만 계몽적이기까지 하다니 그건 불편하다. 아니, 계몽적인 것이야 내가 함량부족의 사람이니 간혹 필요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저항할 수 없는 폭력 앞에서 떠는 사람을 희화화해서 계몽적인 이야기에 웃음을 포장한 것은 불쾌하다. 이것이 "다섯 개의 시선" 중, 장진 감독님의 〈고마운 사람〉이라는 영화를 본, 나의 총평이다.

이런, 제기랄! [3rd zine]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Posted by 자캐오

2007/03/31 12:43 2007/03/31 12:43
이올린 태그검색올블로그 태그검색태그스토리 태그검색티스토리 태그검색, 이올린 태그검색올블로그 태그검색태그스토리 태그검색티스토리 태그검색, 이올린 태그검색올블로그 태그검색태그스토리 태그검색티스토리 태그검색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www.zacchaeus.kr/rss/response/29

1. 번데기와 발롯.

나는 74년생이다. 이제 30대 초반에 들어선 나에게는 추억의 군것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번데기"이다. 얼마 전 한 기사에서 한 외국인이 쓴 글의 한 부분을 인용한 것처럼, 동아시아의 훌륭한 기적의 음식이자 최고의 영양식인 번데기!

그런데, 번데기에 대한 나의 아련한 추억이,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던 사건이 하나 있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아직 한국말도 서툰 조카와의 동행 길에서, 길가에서 파는 번데기를 만났을 때이다. 그 번데기 행상을 반기는 나의 반응에 놀라며, 무슨 음식이냐고 묻는 조카의 질문에 어렵사리 대답을 해주었는데 뜨악하는 조카의 반응….

그 순간 나의 뇌리를 스치는 사건 하나가 있었다. 필리핀에 갔을 때, 발롯 Balut이라는 필리핀의 평범한 이들의 군것질거리를 받았을 때의 나의 반응. 필리핀어로 발롯이라 부르는 그것은 부화 직전의 오리 알을 삶은 것인데, 최고의 영양식이라고 추천하는 현지인 가이드의 따스한(?) 배려 앞에서 그냥 부들부들 떨었던 내가 떠오른 것이다.

번데기와 발롯. 둘 다 동아시아인들인 우리들의 환경적/문화적 배경 아래에서 선택한 영양식일 뿐인데, 나는 발롯이라는 그네들의 선택에 부들부들했으면서도 번데기에 뜨악하는 조카의 반응에는 의아한 시선을 보냈었던 것이다.

그처럼 우리가 다양한 배경 아래에서 겪는 많은 경험들이 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익숙함과 불편함으로 정리가 되고, 그중에서도 익숙한 경험은 이후에 좋은 추억이 되기도 하고 편견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익숙함과 불편함이라는 것이, 때로 우리의 진일보를 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익숙함과 불편함.

나는 태어나서 스무 살까지, 한국의 길거리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장로교회라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공동체1)에서 그 신앙공동체의 "신앙의 유산"을 이어받았다. 그러다가 그 신앙공동체의 독선적인 권위주의와 비역동적인 가르침과 모습에, 스무 살이 되던 해에 그 공동체를 떠나게 되었고, 이후 현대 오순절 운동에 있어서 나름대로의 헌신을 했다고 강조하는 하나님의교회와 하나님의성회(순복음)라는 신앙공동체에서 10년을 성도와 신학도와 전도사로서 자랐다.

그런데 그렇게 10년이 좀 넘으니, 그 신앙공동체도 서서히 화석화되어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전의 신앙공동체들의 독선적인 권위주의와 비역동적인 가르침과 모습에 반대하는 신앙운동을 지향했던 초기정신을 잃어갔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위의 두 신앙공동체가 강조하는 흐름이 아닌 다른 신앙유산의 흐름을 간직하고 있는 신앙공동체를 찾아 현재는 성공회라는 신앙공동체에 머물러 있다.

한편, 그렇게 보수적인 신앙공동체에서 자라면서도 고등학교 때에는 전교조 투쟁에 동참하는 학생이자 해방신학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선배의 후배로서, 청년의 때에는 이 땅의 사회와 신앙공동체에 대해 그 근본과 주류적 가르침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지는 사람으로서 자라왔다.

사람이 모이는 공동체이면 어느 곳이나 오래전부터 그 공동체를 지켜왔고 가꿔왔던 구성원들이 있고, 나처럼 나그네처럼 어느 시점에 들어와서는 언저리에 자리를 잡는 구성원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두 구성원 집단은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와 서로에 대한 다른 관점과 요청들을 하게 된다. 그 가운데 나라는 사람은, 언저리의 시선을 지닌, 그렇지만 내가 속한 신앙공동체에 대한 좀더 다양하고 정제된 정보를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교육받은 신학도이자 현장 활동가로 인도받아온 것이다.

그런 나이기에 익숙함이란 나에게 그리 편안한 단어가 아니다. 내게는 익숙함보다는 중앙이든 언저리이든,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익숙한 것들에 대해 불편함을 선사하는 시선과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 오히려 어울리기 때문이다.


3. 급진적 Radical, 좌파 Left, 그리고 성령운동 Holy Spirit Movement.

나는 가난하다2).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가난하고, 내가 속해있는 공동체의 기준으로 봤을 때도 언저리에 위치하고 있는 나는 가난하다. 그런 내게 급진적인 질문은, 곧 근본적인 질문이다3). 그것은 생존의 질문이기 때문이고, 내 생존의 문제를 위협하거나 억압하는 이들이 할 수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선택할 수 없는 길인 좌파4)로서의 길은, 좀더 온건하게 걷느냐 아니면 과격하게 걷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인 내가 선택해야 할 길이다. 그래서일까? 나라는 사람은 방법에 있어서 온건과 과격만 다를 뿐, 늘 긴장을 가져오는 말썽꾸러기 troublemaker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말썽꾸러기 같은 내가 신앙의 여정 가운데 끊임없이 동행해온 신앙운동이 하나 있다. 그것은 현대의 신앙공동체들 사이에서도 나처럼 말썽꾸러기 같은 취급을 받는 그런 신앙운동이다. 중앙이나 위에 있든, 언저리나 아래에 있든 상관없이 모두에게 근본적이며 급진적인 질문을 던지고, 모두에게 생존의 질문을 던지며 다양한 배제의 문제에 안고 있는 이들을 구원과 해방으로 초청하는 그런 운동이다. 그것은 바로 성령운동인 것이다.


4. 성령운동이 주는 긴장.

성령운동을 받아들이는 곳에는 언제나 긴장이 생기게 된다. 그러한 긴장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은사"와 "제도"사이의 긴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특히나 공교회성을 강조하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공동체일수록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렇지만 그러한 긴장이 꼭 그러한 신앙공동체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그러한 긴장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성령운동을 대표적인 지향과 특징으로 강조하는 오순절& 카리스마 교회들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학적으로는 종말론적인 교회론과 역사적인 교회론 사이의 긴장이고, 조직적으로는 평신도와 성직자 사이의 긴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하나의 사건"으로서의 교회로 접근하느냐 아니면 "하나의 조직"으로서의 교회로 접근하느냐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긴장은 분열을 위한 긴장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긴장이다.

동방정교회 전통의 요한 지지울라스 John Zizioulas는 교회에 대해 정의하기를, 그리스도가 "설립하였고" 성령으로 "조직된"것이라고 했다. 그러한 관점으로 봤을 때, 오늘날 이 땅의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아래에 있고 성령님에 의해 조직되고 유지될 때에만 진정한 교회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칼 라너 Karl Rahner의 말처럼, 교회는 교회 자체의 관점에서 이해되거나 정의될 것이 아니라 외부 곧 하느님의 성령으로부터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가 자신을 내어 준 것처럼 동일하게 세상에게 자신을 내어주어야 한다. 그렇기에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유대를 넘어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신 것처럼, 교회를 "넘어서"세상에게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것이다.


5.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들.

이처럼 교회로부터 시작하여 교회를 넘어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모든 존재들은, 그들과 만남을 통해 "성령님과의 교제"라는 사건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성령님의 교제 안에 들어오는 인간 존재들과 이 땅의 생명들은 각각 지나치게 개별화되고 고립화된 상태를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또, 끊임없이 소비하고 파괴하고자 하는 개인주의적인 경향과 왜곡된 정보의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성령님이 우리에게 그러하셨듯이 다른 사람과 생명들을 위해 선회 turning하여, 그들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게 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하며 하느님 나라를 기준으로 사회를 변혁하며 사는 종말론적 지향을 가지면서도, 지금 이곳에서의 성령체험(순간적인 신과의 합일)을 강조하는 체험적 지향을 가진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데 그저 넋 놓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희망하는 능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것을 위해 비관적 예언자의 자세로 정의와 평화(平和)를 추구하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추구의 동력을 세상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의와 평화의 근본인 하느님과의 깊은 영적 만남을 통해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신화를 향해감으로 헌신의 동력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가르치신 길 중에 하나만을 옳은 길이라고 왜곡하는 신앙공동체를 향해 증거자로서 존재하는 성령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신앙공동체와 투쟁해야 한다.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 불리기위해서라면, 성령님의 큰 품에 의지하려하지 않고 교권의 권위와 성서와 오랜 전통의 가르침의 해석들을 독점하여 지배하려고 하는 어긋난 신앙공동체와 순교의 정신으로 싸워 돌이키도록 해야 할 것이다. 싸움의 방식은 다양할 수 있으나, 최소한 왜곡되고 어긋난 신앙공동체에 안주하고자 하는 익숙함으로부터 순교의 자세로 탈주를 시작해야 한다. 익숙함에 안주하여 주저앉아 마지막 때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2nd zine]

참고도서
하나. 벨리-마띠 캘케이넨,『21세기 성령론』(프라미스, 2005).
두울. 류장현,『한국의 성령운동과 영성』(프리칭아카데미, 2004).


1) 이후 신앙공동체라고 줄여서 칭할 때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공동체를 뜻한다.
2) 여기서 말하는 가난이란, 소외와 배제를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다.
3) 'Radical'이란 단어는, '근본적, 기초적'이라는 뜻과 함께, '급진적, 극단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4)'Left'라는 단어의 어원에는'약한, 쓸모없는, 버려진'이라는 뜻이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070325,나눔에 대한 전교인 교육을 진행하며.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Posted by 자캐오

2007/03/31 12:32 2007/03/31 12:32
이올린 태그검색올블로그 태그검색태그스토리 태그검색티스토리 태그검색, 이올린 태그검색올블로그 태그검색태그스토리 태그검색티스토리 태그검색, 이올린 태그검색올블로그 태그검색태그스토리 태그검색티스토리 태그검색, 이올린 태그검색올블로그 태그검색태그스토리 태그검색티스토리 태그검색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www.zacchaeus.kr/rss/response/28

« Previous : 1 : ... 275 : 276 : 277 : 278 : 279 : 280 : 281 : 282 : 283 : ... 287 : Next »

블로그 이미지

가난, 소외, 여성 & 그 언저리에 함께 하는 무지개빛 성령님...

- 자캐오

Calendar

«   2017/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Site Stats

Total hits:
293412
Today:
155
Yesterday:
137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