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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사순절기,
  낙태죄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수요 저녁 기도.”

# 3/6(수) 오후 8시에는 ‘사순 첫날 재축복식’이 진행됩니다.
* 언   제: 3/6 ~ 4/17, 매주 수요일 저녁 7:30, 총 7회
* 어디서: 성공회 용산나눔의집(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98길 6, 2층)
* 누   가: 성공회 길찾는교회

사순절기.

차별과 배제,
슬픔과 고통을 가로질러 부활로 나아가는 시간.

구조적인 혐오와 소외를 넘어서는 성찰의 시기.

우리는 ‘낙태죄’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불합리한 낙태죄를 유지하여
여성의 고통과 삶을 소외시키는 권력과 구조에 저항합니다.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십시오.

우리들의 기도와 연대로
‘낙태죄 폐지’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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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9/03/04 23:35 2019/03/04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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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변모 사건’이 알려주는 우리들의 사명.”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오늘 우리는 사순절기의 시작을 앞두고 ‘변모 사건’에 대한 성서 말씀을 읽습니다. 우리, 그중에서 복음 말씀인 루가의 복음서 9장 28절부터 31절까지 한 목소리로 읽어 봅시다.

28 이 말씀을 하신 뒤 여드레쯤 지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다. 29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그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빛났다. 30 그러자 난데없이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께서 머지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일 곧 그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가운데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중요한 여러 인물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가장 먼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죠. 왜일까요?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우리가 함께 읽는 성서는 초기 교회와 지도자들이 ‘특정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선택하여 엮은 책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읽은 본문도 특정한 목적과 의도가 있겠죠? 그게 뭘까요?

우리, 교회의 스승 중 한 명인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가 오늘 복음 말씀에 덧붙인 해설을 한 번 읽어 봅시다.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받아들인 이들을 어떻게 그 놀라운 일의 목격자로 만드셨습니까? 그분은 세 제자를 뽑아 산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러고는 거기서 놀랍도록 밝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바뀌어 옷마저 번개처럼 번쩍이고 빛처럼 반짝였습니다 ... 모세 율법과 거룩한 예언자들의 말이 그리스도의 신비를 미리 보여준 것 또한 사실입니다. 모세 율법은 예형과 그림자로 그리스도의 신비를 보여 주었습니다 ... 모세와 엘리야가 그분과 함께 서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일종의 설명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과 예언을 경호원으로 거느리고 계심을 똑똑하게 보여 주는 것이지요.”
-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루카 복음 주해> 51.,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Ⅳ>, 253쪽.

그렇습니다. 초기 교회와 신자들은 자신들을 이어갈 또 다른 교회와 신자들에게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이런 내용을 전하려고 합니다.

“모세 율법과 거룩한 예언자들의 말이 그리스도의 신비를 미리 보여준 것 또한 사실입니다. 모세 율법은 예형과 그림자로 그리스도의 신비를 보여 주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와 신자들은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이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무엇보다 이 가르침은 그저 ‘믿음’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의 중요한 인물 세 사람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직접 목격한 놀라운 사건’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만큼 중요하고 신빙성이 높다는 뜻이죠.

왜일까요? 그건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와 신자들에게는 구약,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강조했던 전통적인 야훼 신앙과의 연속과 단절이 중요한 숙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스승 중 한 명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늘 2독서 말씀인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부분에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입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읽어 봅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구약이 아니라 구약을 가리고 있는 너울입니다. 그로써 그리스도를 통해 구약이 이해됩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 없이는 숨겨져 있고 모호한 것의 뜻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이 사도는 곧바로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16절). 그러니까 가려져 있던 것을 주님의 은총이 쓸모없는 것으로 판단해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유익한 진리를 가리고 있던 덮개가 치워지는 것입니다.”
- 아우구스티누스, <믿음의 유익> 3.9.,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Ⅸ>, 347쪽.

초기 교회와 신자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야훼 신앙을 폐기하거나 왜곡한 게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보다는 그동안 ‘숨겨져 있고 모호했던 진리’를 아주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을 전할 뿐이라고 항변합니다.

오늘 1독서인 출애굽기에 기록되어 전해지는 ‘모세의 변모 사건’은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왜냐면 모세가 이스라엘의 신이자 참된 신인 ‘야훼’를 대면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일시적이고 간접적’이었습니다. 야훼로부터 온 영광이 모세에게 잠시 머물렀을 뿐이었죠.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이 전하고 2독서가 강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변모 사건’은 모세의 변모 사건을 넘어섰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에서 중요한 두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가 한자리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초기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직접 목격한 사건입니다.

무엇보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인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뿐 아니라 온 몸이 변하고, 심지어 그가 입고 있던 옷마저 눈부시게 빛났습니다(루가 9:29).

모세의 변모 사건에서는 모세의 얼굴이 빛나 너울로 그 빛을 가려야 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변모 사건에서는 온몸이 빛나고 그 몸을 둘러싼 옷마저도 빛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초기 교회와 신자들에게 예수의 변모 사건은 그들이 어릴 적부터 듣고 배워온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과 맥을 같이하면서도 그 가르침을 넘어서는 놀라운 이야기였습니다.

그 때문에 초기 교회와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을 ‘율법과 예언의 완성’이라고 믿고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변모 사건은 역사적인 사실일까요? 과학적으로 가능한 일일까요?

저는 우리가 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거나 역사적 사실로 증명하려는 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성서는 100% 역사책이나 과학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삶과 공동체의 지향이자 기준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이들의 신앙 고백을 모아 엮은 책입니다.

그렇다면 2019년 사순절기를 앞둔 우리가 이 변모 사건에 대한 말씀을 읽을 때에도 이러한 관점과 기준으로 읽고 적용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변모 사건에 대해 오늘 2독서인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읽어 봅시다.

17 주님은 곧 성령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18 우리는 모두 얼굴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2고린 3:17-18)

이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2천 여 년 전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각자와 공동체의 자유’로 당신을 따를 때, 우리도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때 “영광스러운 상태”는 이런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 4장 2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 봅시다.

“우리는 드러내지 못할 창피스러운 일들을 다 버렸으며 간교한 행동도 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비뚤어지게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밝혀 드러내었으니 우리는 하느님 앞에나 모든 사람의 양심 앞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변모를 닮아간다는 건, “하느님 앞에나 모든 사람의 양심 앞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걸 뜻합니다.

무엇보다 이런 “영광스러운 상태”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서만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이 직분을 맡은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2고린 4:1)

이에 대해 교회의 스승인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였습니다.

“끝까지 견뎌 내는 것은 하느님 자애 덕분입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온갖 시련이 짓눌러도 가라앉지 않으며 나아가 기뻐하고 담대히 말합니다.”
- 아우구스티누스, <믿음의 유익> 3.9.,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Ⅸ>, 354쪽.

그러므로 매일 매순간, 실패하고 좌절해도 또 다시 ‘참된 부활의 신앙을 사는 신자이자 교회’로 살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용산나눔의집 식구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우리 모두 이제 곧 맞이할 사순절기 동안 ‘하느님의 자비’를 간절히 구합시다.

그 하느님의 자비에 기대어 이 땅에서 “영광스러운 상태”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자 교회의 일원이라는 ‘맡은 직분’을 잘 감당합시다.

그 맡은 직분에 주어진 ‘사명’을 기억하며 실천합시다. 그 사명은 하느님의 자비에 기대어 주의 변모를 닮은 영광스러운 상태를 유지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는 오늘의 시편인 시편 99편 4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 일입니다.

“능력의 왕이여, 당신께서는 정의를 사랑하시고 공의와 법을 세우시어 야곱의 가문에 바른 기틀을 잡으셨사옵니다.” (시편 99:4)

이처럼 ‘정의를 사랑하시고 공의와 법을 세우시는 능력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 앞에나 모든 사람의 양심 앞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는 삶을 지향합시다.

이런 삶은 “우리는 드러내지 못할 창피스러운 일들을 다 버렸으며 간교한 행동도 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비뚤어지게 전하지도” 않을 때에 시작된다는 걸 기억합시다.

무엇보다 이 모든 일이 우리 각자의 삶과 교회 안에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며 의지하는 사순절기를 맞이합시다.

우리 모두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잠시 묵상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멘.

* 본기도
영광의 하느님,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놀라운 변화를 나타내 보이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들이 이 세상의 근심과 불안에서 벗어나,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1독서, 출애 34:29-35 / 2독서, 2고린 3:12-4:2 / 복음, 루가 9:28-36

* 2019년 3월 3일, 사순 직전 주일 / 주의 변모 주일 본문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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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9/03/03 09:05 2019/03/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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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지향’을 갖고 ‘선언’한다는 것과 그것들을 발 딛고 사는 ‘현실’ 가운데 ‘구체화’하는 건 꽤 다른 일이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실과 구체성’을 말하는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이 ‘지향과 선언’을 강조하는 걸 보고 비아냥거린다. 현실을 모르면서 떠들거나 이뤄질 수 없는 이상향만 좇는다고.

또 ‘지향과 선언’을 말하는 어떤 이들은 ‘현실과 구체성’을 말하는 이들에게 화를 낸다. 쉽게 타협하는 이들이라고 단정하며 ‘배신자 또는 정신이 죽은 이들’이라고 저주할 때도 있다.

어떤 이가 지향이나 선언을 강조한다고, 현실을 모른다며 쉽게 규정 수 있을까. 그들이 현실을 출발점으로 삼아 구체적인 정책과 작동 방식을 만들어가는 일의 중요성을 무시한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반대로 어떤 이가 현실과 구체성을 강조한다고, 또 다른 층위에서 작동하는 ‘무엇’을 무조건 부정하거나 무시한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허수아비 적’을 만들어 ‘사이다 발언’을 쏟아내며 내 편을 늘리는 건 쉽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설명되거나 작동되지 않는 게 한둘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런 방식으론, 눈앞에 있는 ‘나와 다른 의견을 갖고 다른 방법론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또 다른 일들을 함께하는 건 어렵다.

우리가 그토록 소망하는 ‘다른 세계와 관계’는, 결국 이 땅에 함께 발 딛고 살아가는 ‘나와 다른 이들’과 함께 만들 수밖에 없다.

내게는 그게 진짜 현실이고 진짜 지향이다.

- 2019.03.02. PM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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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9/03/03 00:06 2019/03/0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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