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경제가 취약한 고용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으로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맙시다.”

어느 노동 운동가의 주장이 아니다.

세계성공회 수장인 저스틴 웰비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가 2018년 9월에 열린 ‘영국 노동조합 협의회’(TUC) 연례 총회에서 행한 연설 가운데 한 대목이다. 그 연설 가운데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성모송가는 영원불멸한 시로서 혁명을 노래합니다. 이 노래는 하느님이 어떠한 분인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 이 노래가 전하는 하느님은 ‘정의’입니다. ‘하느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지, 우리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기준입니다. 그것은 정치이며, 특정한 정당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시종일관 정치적입니다. 하지만 좌든 우든, 하느님은 오로지 나의 편이라고 주장하면 위험에 빠집니다. 예수께서는 매우 정치적인 분이셨습니다.”

대다수 서구 교회는 이처럼 ‘노동과 정치’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 가운데 ‘정의’(Justice)가 매우 중요한 기준임을 강조한다.

물론 서구 교회도 여러 한계가 있다. 특히 특정 시기에 권력과 깊이 유착하거나 앞장섰던 일은 ‘분명한 한계’다.

지금도 종종 자신들이 ‘첫 번째 교회’이거나 ‘기준을 정하는 주류 교회’이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여기는 태도’는 문제가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을 통해 많은 걸 배울 수 있다. ‘교회란 무엇인가’를 끈질기게 묻고, ‘교회는 노동과 정치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 깊고 넓게 토론하는 모습을 배워야 한다.

성공회-복음주의 성향으로 알려져 있는 저스틴 웰비 대주교. 그래서 그의 정치적 성향은 중도에 가깝다. 그런 분인데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리아의 노래, 성모송가는 신약성서의 정수를 담은 급진적인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진지하게 살펴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권력과 기득권에게 위협임을 알게 됩니다.”

“1879년에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테이트는 영국 노동조합과 만나면서 많은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게 잉글랜드 성공회가 노조를 혐오하는 추악한 태도를 바꾸도록 촉구했습니다.”

“정의를 이뤄낼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이고, 영국 노동조합, 교회이고, 정부와 사회의 모든 이들입니다.”

많은 이들이 서구 사회에서 기본처럼 강조되는 ‘정교분리’에 대해 반만 말한다.

그 둘이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고 사익을 얻기 위해 함부로 개입하지 않아야 하는 건 맞다. 그렇지만, 이 둘은 서로가 ‘공공성을 지속하는 조직’으로 유지되도록 깊고 넓게 비판하거나 개입한다.

철저하게 원칙과 법률 그리고 합리적 관행 아래 진행되는 측면이 강하나, 서구 교회는 ‘정당한 노동’을 왜곡하거나 위축시키는 그 어떤 시도에도 강하게 반발하는 그룹 중 하나다.

2019년 이 땅에 자리 잡은 교회들은 ‘노동과 정치’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느님의 정의’라는 근거와 기준. 이에 근거한 ‘정당한 노동’과, 이런 노동이 지속될 수 있는 구조와 역동을 만드는 ‘좋은 정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을까.

참고로 이쯤에서 하나만 짚고 넘어갈까 한다.

이런 ‘정당한 노동과 좋은 정치’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도저히 용납되기 어려운 게 ‘세습’이나 ‘표절’이다. 좋은 정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교란 행위이고, 정당한 노동에 대한 도둑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너무 비일비재하고 심지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말로 포장하는 이 땅의 일부 교회와 신자들이 있다. 이런 교회와 신자들은 ‘교회, 노동, 정치’에 대해 어떤 기준과 입장을 갖고 있는 걸까.

이런 질문을 갖고, 성공회 신자이자 한 명의 노동자인 허훈님께 부탁드려 번역한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의 연설문을 읽어 보시길 권한다.

[허훈님 번역] “캔터베리 대주교의 영국 노동조합 연례총회 연설”
- Archibishop of Canterbury's speech at the TUC cenference in Manchester, Sep 1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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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9/01/18 02:03 2019/01/18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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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영혼의 돌봄.

“[그리스도교적] 사목제도, 새로운 외교적∙군사적 기술, 마지막으로 내치. 저는 바로 이 세 가지야말로 서구의 역사에서 국가의 통치화라는 근본적인 현상이 발생할 수 있게 됐던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 미셸 푸코,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년: 안전, 영토, 인구>, 오르트망 옮김, 165쪽.

지난 5년간 거의 쉬지 않고 격주로 모여, 발제와 토론을 이어간 모임.

꽤 좋은 안내자들이 있어서 최근에는 ‘미셸 푸코, 자유주의 3부작 세미나’를 진행 중이다.

첫 번째 책인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를 지나 두 번째 책인 <안전, 영토, 인구> 10강까지 읽었는데, 오늘 9강과 10강에 대한 토론을 하다가 4강을 부분적으로 다시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안내자의 얘기를 들으며 밑줄 쫘~악~ ^^

그리스도교적 사목제도. 국가의 통치화라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중요한 토대이자 징검다리가 된 ‘사목 권력’.

현대에도 ‘영혼의 돌봄’이란 이름으로 이어져 우리 안팎에서 다양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영혼의 돌봄 그 자체를 비판적으로 보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을 텐데, 일단 짧게 대답하면 그건 아니다.

다만, 그 맥락과 배치 그리고 작동 방식을 고려할 때에 우리는 꼭 질문해야 한다.

‘영혼의 돌봄과 순종’. 이 관계에서 발생하는 권력 관계와 다양한 역동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그대로 수용되어야 하는가.

오늘 따라 토론이 길어져 늦은 밤. 여러 가지 일들과 겹쳐 생각이 많아진다.

두 번째 읽으니 이제 겨우 조금씩 이해되는 푸코의 책. 이 밤엔 나머지 부분들을 찬찬히 읽어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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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6 03:55 2019/01/16 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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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만드는 ‘드림캐처’ 무지개 팔찌 묵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드림캐쳐 펜던트로 무지개 팔찌 묵주를 만들 때면, 혼자서 작은 소망을 품게 된다.

악몽을 물리치고 좋은 꿈을 꾸게 한다는 ‘이야기’가 이 무지개 팔찌 묵주를 차고 있는 사람에게 ‘작은 힘’이 되기를 소망한다.

나야 성공회 사제인지라, 이런 상징이 당장 어떤 능력을 발휘한다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내 주변에는 이런 이야기가 주는 ‘작은 힘’이라도 응원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매 순간이 ‘존재에 대한 부정’에 저항하는 선택이고, ‘평범한 한 사람이 누리는 것들’에 대한 소망과 투쟁인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런 성소수자 길벗들에게 ‘더 잘하라’는 웃긴(?) 일들이 매일같이 벌어지는 세상. ‘성소수자 독재’처럼 웃기지도 않은 말들이 버젓이 통용되는 교회.

이런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는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연대란 단순한 선의나 시혜를 베푸는 게 아니다. 내가 연대하는 상대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정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감히 그를 ‘동지’라고 부를 수 있고, 그가 나를 ‘동지’라고 믿을 수 있을 때에 시작되는 동행이 바로 연대다.

나는 성소수자 길벗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가능한 반 걸음 뒤에서 동행하려고 노력한다. 그동안 성소수자 길벗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탄압한 ‘그리스도교 교회’라는 그룹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내 역할과 역량이 한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감히’ 내가 모든 문제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거나 행동하지 못한다.

그래서 연대하는 당신과 나는 각자 잘할 수 있는 것과 목표 등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는 연대해야 한다고 믿는다.
연대를 말한다면,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도 ‘동지’라고 부를 수 있는지 ‘상호 존중에 근거한 상호 식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상호 식별이 가능한 상호 존중’만이 내일도 우리가 서로를 ‘동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한다.

이 밤, 이 드림캐쳐 무지개 팔찌 묵주를 받게 될 그 사람 앞에 놓인 악몽이 사라지고 좋은 꿈이 이뤄지는 날들이 더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내 작은 선택과 연대가 그에게 힘이 되기를 소망하고 또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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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5 10:00 2019/01/1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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