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식구들이 모두 돌아간 뒤 텅빈 예배실 공간.

그곳에서 다시 떠올리는, 내가 지향하는 그리스도교.

‘무기력, 수치, 무감각과 마주하며 동행하는 그리스도교’.

3년째 한 공간을 공유하는 두 개의 신앙 커뮤니티.

등록/미등록 이주민 식구들과 15년을 동행한 성공회 용산나눔의집.

성소수자 식구들을 비롯해 다양한 길벗들과 만 5년째 동행하고 있는 성공회 길찾는교회.

소명과 생존의 어디쯤에서 비틀거리며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날들.

만물 안에 깃드신 하느님, 사람이 되신 하느님, 우리들의 하느님 그리고 편드시는 하느님.

그렇게 쌓인 넓고 깊은 이야기들.

이제는 사람들과 구체적으로 나눌 수 있도록 정리하는 숙제가 눈 앞에 있다.

찬찬히 한 걸음씩. 내 리듬과 보폭으로. 좋은 길벗들과 함께.

* 또 하루를 마무리하며 공간을 정리하다가 남기는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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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9/01/21 02:50 2019/01/21 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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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웃과 함께 누리는 잔치 가운데 베풀어진 기적.
그 기적으로 알게 되는 ‘예수는 그리스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기회가 될 때마다 말씀드리지만,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성서는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모아 엮은 책’입니다.

그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제자들이 흩어져 있던 여러 공동체들과 회람하던 걸 모아 엮은 책입니다.

그 목적은 ‘우리가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가 강조하는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활동하던 시대와 사회를 배경으로 합니다.

무엇보다 그 성서를 전수받은 이들은 성서에 기록된 여러 이야기들이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를 논증하고 따지는데 집중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신들의 선생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비롯해 앞선 신앙 공동체가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왜 이런 이야기를 선택해서 우리에게 전하는가’를 질문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오늘 연중 2주일, 복음서 말씀인 요한의 복음서에 기록되어 전해지는 ‘갈릴래아 지방 가나의 혼인 잔치 사건’을 읽은 우리도 같은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초기 교회와 신자들, 그 중에서도 요한의 복음서를 기록하고 회람하며 엮은 사람들은 왜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기적’으로 가나의 혼인 잔치를 기록하여 전했을까?’

저는 오늘, 이 질문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그럼 이쯤에서 초기 교회의 스승은 가나의 혼인 잔치 사건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들어봅시다.

교회의 스승 중 한 명인 토리노의 막시우스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우리 함께 한 목소리로 읽어 봅시다.

“그분께서 혼인 잔치에 가신 것은 연회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적으로 당신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께서 혼인 잔치에 가신 것은 포도주를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포도주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 토리노의 막시무스, <설교집> 23.,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Ⅴ>, 184쪽.

토리노의 막시무스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일어난 ‘물을 포도주로 바꿔 베푼 사건’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알리고, 포도주를 주시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지난 공현대축일과 주의 세례 주일 때도 말씀드린 것처럼, 성서라는 이름으로 모아서 엮은 이야기들은 초기 교회들 가운데 회람되고 전해지던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목적을 가지고 선택될 것들입니다.

그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놀라운 기적을 베푸는 분으로 우리들과는 다른 존재다’라는 걸 강조하고 알리는 게 중요한 목적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공현대축일이나 주의 세례 주일에 교회가 함께 읽은 성서 본문들, 그리고 오늘 요한의 복음서 본문 등에 기록된 ‘놀라운 기적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과는 다른 존재다.’라는 걸 강조합니다.

그런데 초기 교회가 엮어 전하는 이야기들은 그런 부분만 강조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함께 읽은 막시무스의 설명을 통해 ‘가나의 혼인 잔치’를 이렇게 해석해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드러내는 기적을 베풀었다. 그 기적은 당신이 누구인지 드러낸 사건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포도주를 주시기 위해’ 우리 삶 한가운데로 성큼 다가오신 사건이기도 하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요한의 복음서가 기록하여 전하는 ‘물을 포도주로 바꿔 베푼 사건’은 ‘나자렛 예수가 그리스도다’라는 신앙 고백과 더불어 ‘또 다른 의미를 품은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친구이신 예수께서 우리 일상에서 함께 잔치를 즐기며 그리스도이신 당신을 드러내셨다는 이야기로 말입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일상 한가운데로 들어와 함께 잔치를 즐기고 흥겹게 하시며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오늘 요한의 복음서 말씀을 이렇게 해석해 본다면 지나친 걸까요? 저는 오늘날에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이제 곧 다가올 긴박한 종말’이라는 관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말씀을 해석하는 초기 교회와 우리는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는 그 시대로부터 2천 여 년이나 지나, 긴박한 종말보다는 ‘종말이란 하느님이 사랑으로 다스리는 나라를 위한 상징과 은유이기도 하다’라는 해석이 가능한 때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방금 앞에서 말씀드린, 우리 일상 한가운데로 들어와 함께 잔치를 즐기고 더욱 흥겹게 하는 “첫 번째 기적”을 행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초대한 분이 바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것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고 들은 요한의 복음서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예수께서 혼인 잔치에 가서 기적을 행하신 건 분명 ‘계획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잔치 가운데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걸 알리고 잔치 집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고 일러둡니다(요한 2:3-5).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물을 포도주로 바꿔 베푸는 “첫 번째 기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요한 2:4, 11).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예수께서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의 흥겨운 잔치 가운데 “첫 번째 기적”을 베풀 도록 예비하고 안내합니다.

어찌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머니 마리아의 ‘가르침’에 응답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놀랍고 특별한 일, 그래서 사람들에게 기이하게 받아들여지는 기적은 사람들의 일상과 필요 가운데 베풀어질 때에 기쁨이 되고 은총이 된다는 마리아의 가르침에 예수께서 ‘그렇습니다’라고 응답하신 거죠.

그러므로 용산나눔의집 식구 여러분, 오늘 2독서인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 기록된 여러 은사들이 우리와 이웃들의 일상을 잔치처럼 만드는지 아닌지는 은사를 식별하는데 중요한 기준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느님으로부터 허락받았다는 여러 은사들이 결국 교회와 그에 속한 이들만 기쁘게 하고 그들에게만 은총으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건 은사가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작고 가난한 이들과 우리 이웃들에게 기쁨과 은총이 되는 은사만이 성령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런 은사만이 우리 이웃들에게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오늘 복음 말씀이 전하는 기적과 2독서가 말하는 은사들이 우리와 이웃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리는 도구이자 통로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종종 교회가 성서에 기록하여 전하는 이야기나 기적들에 대해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과학적으로 또는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기억과 전언이 더 뚜렷했던 시대에 활동했던 교회의 스승들이나 초기 교회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은 ‘설명할 수 없다’라고 정직하게 말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 ‘설명할 수 없는 과정’ 이후에 그들이 누린 ‘기쁨과 은총’에 대해 이야기하고 전하는데 힘썼습니다.

오늘날 이 땅의 교회와 우리가 회복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요?

논증하느라 애써야 할 부분도 있지만, 그보다 더 힘써야 할 부분은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것들로 인해 교회와 우리가 누리는 기쁨과 은총에 대해 이야기하고 전하는데 더 힘써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잠시 묵상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멘.


“갈릴래아에서 열린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아무런 맛이 없는 물이 사라지고 향기 가득한 포도주가 등장한 변화를 만들어 낸 방법을 무슨 말이나 관념으로 제대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합이 아니라 창조였습니다. 그 창조는 없었던 것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변화였습니다. 더 강한 성분이 혼합되어 연한 액체가 얻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있던 존재물이 사라지고 새로운 존재물이 생겨났습니다 ... 시력과 감각은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설명하지 못하지만, 얻어진 결과에선 하느님의 힘이 드러났습니다.”
-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삼위일체론> 3.5.,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Ⅴ>, 193-194쪽.

* 본기도
은혜로우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나 혼인잔치에서 놀라운 영광을 드러내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성령의 선물을 풍성히 주시어 새 생명으로 가득 찬 기쁜 생활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1독서, 이사야 62:1-5 / 2독서, 1고린 12:1-11 / 복음, 요한 2:1-11

* 2019년 1월 20일, 연중 2주일(Second Sunday after the Epiph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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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0 01:38 2019/01/20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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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경제가 취약한 고용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으로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맙시다.”

어느 노동 운동가의 주장이 아니다.

세계성공회 수장인 저스틴 웰비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가 2018년 9월에 열린 ‘영국 노동조합 협의회’(TUC) 연례 총회에서 행한 연설 가운데 한 대목이다. 그 연설 가운데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성모송가는 영원불멸한 시로서 혁명을 노래합니다. 이 노래는 하느님이 어떠한 분인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 이 노래가 전하는 하느님은 ‘정의’입니다. ‘하느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지, 우리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기준입니다. 그것은 정치이며, 특정한 정당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시종일관 정치적입니다. 하지만 좌든 우든, 하느님은 오로지 나의 편이라고 주장하면 위험에 빠집니다. 예수께서는 매우 정치적인 분이셨습니다.”

대다수 서구 교회는 이처럼 ‘노동과 정치’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 가운데 ‘정의’(Justice)가 매우 중요한 기준임을 강조한다.

물론 서구 교회도 여러 한계가 있다. 특히 특정 시기에 권력과 깊이 유착하거나 앞장섰던 일은 ‘분명한 한계’다.

지금도 종종 자신들이 ‘첫 번째 교회’이거나 ‘기준을 정하는 주류 교회’이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여기는 태도’는 문제가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을 통해 많은 걸 배울 수 있다. ‘교회란 무엇인가’를 끈질기게 묻고, ‘교회는 노동과 정치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 깊고 넓게 토론하는 모습을 배워야 한다.

성공회-복음주의 성향으로 알려져 있는 저스틴 웰비 대주교. 그래서 그의 정치적 성향은 중도에 가깝다. 그런 분인데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리아의 노래, 성모송가는 신약성서의 정수를 담은 급진적인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진지하게 살펴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권력과 기득권에게 위협임을 알게 됩니다.”

“1879년에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테이트는 영국 노동조합과 만나면서 많은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게 잉글랜드 성공회가 노조를 혐오하는 추악한 태도를 바꾸도록 촉구했습니다.”

“정의를 이뤄낼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이고, 영국 노동조합, 교회이고, 정부와 사회의 모든 이들입니다.”

많은 이들이 서구 사회에서 기본처럼 강조되는 ‘정교분리’에 대해 반만 말한다.

그 둘이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고 사익을 얻기 위해 함부로 개입하지 않아야 하는 건 맞다. 그렇지만, 이 둘은 서로가 ‘공공성을 지속하는 조직’으로 유지되도록 깊고 넓게 비판하거나 개입한다.

철저하게 원칙과 법률 그리고 합리적 관행 아래 진행되는 측면이 강하나, 서구 교회는 ‘정당한 노동’을 왜곡하거나 위축시키는 그 어떤 시도에도 강하게 반발하는 그룹 중 하나다.

2019년 이 땅에 자리 잡은 교회들은 ‘노동과 정치’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느님의 정의’라는 근거와 기준. 이에 근거한 ‘정당한 노동’과, 이런 노동이 지속될 수 있는 구조와 역동을 만드는 ‘좋은 정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을까.

참고로 이쯤에서 하나만 짚고 넘어갈까 한다.

이런 ‘정당한 노동과 좋은 정치’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도저히 용납되기 어려운 게 ‘세습’이나 ‘표절’이다. 좋은 정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교란 행위이고, 정당한 노동에 대한 도둑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너무 비일비재하고 심지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말로 포장하는 이 땅의 일부 교회와 신자들이 있다. 이런 교회와 신자들은 ‘교회, 노동, 정치’에 대해 어떤 기준과 입장을 갖고 있는 걸까.

이런 질문을 갖고, 성공회 신자이자 한 명의 노동자인 허훈님께 부탁드려 번역한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의 연설문을 읽어 보시길 권한다.

[허훈님 번역] “캔터베리 대주교의 영국 노동조합 연례총회 연설”
- Archibishop of Canterbury's speech at the TUC cenference in Manchester, Sep 1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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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9/01/18 02:03 2019/01/18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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