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한 정황과 맥락의 책인 성서를 쉽게 일반화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 특히 ‘마지막 때’와 같은 독특한 이야기는 더 그렇다. 무엇보다 마지막 때에 대한 이야기를 ‘불안과 공포의 속삭임’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희망의 근거이자 사랑의 완성’으로 읽고 삶으로 전해야 한다.

라는 내용을 담은 대림1주일, 조금 긴 제목의 말씀 나눔 ^^

——————

“그 날에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은 서로 사랑하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오늘은 교회력에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대림1주일입니다.

대림절기는 복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람이 되신 하느님’으로 오신 성탄절을 기억하며 기대하는 기간입니다.

이때 중요한 건, 우리가 2천 년 전에 있었던 일로 전해지는 그 사건을 기억만 하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인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탄생’이 우리 한가운데 온전히 이뤄지는 그날, 우리는 그렇게 ‘다시 오시는 하느님’에 대한 약속을 기억하며 기대합니다.

그래서 대림절기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기억하며 기다리는 시간이며, 동시에 ‘다시 오시는 하느님’에 대한 약속을 기억하며 기대하는 시간입니다.

이런 날, 우리는 ‘마지막 때’에 대한 선언을 읽고 듣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인 루가 복음서는 이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 기록하여 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다시 오실 날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셨으니, 그를 ‘하느님’으로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마지막 때는 ‘꼭 이뤄질 약속이자 희망의 근거’가 됩니다.

힘겨운 일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이유만으로 여러 불이익과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그런 날들이 결국 ‘믿는 이들의 승리와 놀라운 보상’으로 끝난다는 메시지는 ‘희망’ 그 자체였죠.

이제 전쟁과 자연재해, 기근 등 여러 가지 징조가 보일 텐데, 이런 것들이 “여름이 벌써 다가온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온 징조라는 말씀은 믿는 이들이 그 어려움들을 견뎌낼 충분한 이유가 되었습니다(루가 21:29-31).

더군다나 예수께서 그 날에 대해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없어지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라고 얘기하셨으니, 눈앞에 닥쳐온 여러 어려움들이 기약 없는 두려움과 공포로 다가오지 않게 되었습니다(루가 21:32).

이처럼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소수 사람들에게 ‘그들이 계속 믿고 따라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들려주는 책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서는 ‘누구나 문자적으로 읽고 세상 모든 일들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독특한 이들이 읽고, 왜 그들이 생명까지 걸고 믿고 따라야만 하는지 알려주는 특수한 책’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마지막 때’에 대한 이야기를 특별한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가 아닌 그 바깥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역사나 사회,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하려는 순간에 온갖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우리, 오늘 복음서 말씀인 루가의 복음서 21장 25절부터 28절까지 한 목소리로 읽어 봅시다.

“그 때가 되면 해와 달과 별에 징조가 나타날 것이다. 지상에서는 사납게 날뛰는 바다 물결에 놀라 모든 민족이 불안에 떨 것이며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올 무서운 일을 내다보며 공포에 떨다가 기절하고 말 것이다.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에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라.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이다.”

이 말씀을 읽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자 ‘다시 오실 하느님’으로 믿고 따르던 소수 그리스도인들의 간절한 마음과 눈으로 읽으면, 이들이 그날을 맞이하기 위해 ‘견디며 기다려야 할 이유와 희망의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과 눈으로 읽으면, ‘불안과 공포’를 속삭이며 ‘곧 이런 날이 올 건데, 너희들 안 믿으면 모두 멸망을 맛보게 된다’는 식으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 ‘협박’으로 읽히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들이 읽고 그 믿음을 흔들림 없이 지키라고 전해진 이야기를,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곧바로 적용하며 그들에게 ‘불안과 공포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라고 외치는 꼴이 되는 겁니다. 이 부분은 적용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을, 왜 그런 관계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관심조차 없는 이웃들이 협박으로 들을 수도 있게 떠드는 걸까요?

우리, 이쯤에서 교회의 스승인 암브로시우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한 목소리로 읽어 봅시다.

“많은 사람이 신앙에서 멀어질 때, 불신의 구름이 밝은 신앙을 가릴 것입니다. 제 경우에는 제 믿음에 따라 거룩한 태양(말라 3:20 참조)이 밝아지기도 하고 흐려지기도 하니까요. 사람들이 하늘의 해를 바라볼 때도, 보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흐리게 보는 사람과 밝게 보는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빛도 믿는 이의 경건함에 따라서 달라지지요.”
- 암브로시우스, <루카 복음 해설> 10, 36-37.,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Ⅳ>, 463쪽.

교회의 스승인 암브로시우스가 말했듯이 ‘보는 사람에 따라’ 볼 수 있는 게 다르고 보이는 게 다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게는 마지막 때에 대한 말씀이 ‘약속이자 희망의 근거이며 사랑의 완성’이지만, 그런 관계와 상관없는 이들에게는 ‘불안과 공포의 속삭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를 향해 선언되고 기록되어 전해진 말씀을 함부로 우리 이웃에게 적용하며 선언하고 외치면 안 됩니다.

그보다는 오늘 1독서인 예레미야의 말씀처럼, 믿는 이들에게 ‘그날은 야훼께서 우리를 되살려 주셨음’을 알게 하는 ‘희망과 약속의 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사랑의 완성’이 이뤄지는 날로 약속받은 사람들답게, 우리가 받은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모든 사랑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이야 말로 ‘마지막 때’를 하느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완성되는 날로 약속받은 사람들이 전하는, 그 무엇보다 강력한 메시지이며 복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께서 친히 우리의 길을 잘 열어, 우리가 여러분에게 갈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여러분의 사랑을 키워주시고 풍성하게 해주셔서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듯이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고 또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마음이 굳건해져서, 우리 주 예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다시 오시는 날, 우리 아버지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1데살 3:11-13)

우리 기억합시다. 그 날에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은 마지막 때를 ‘불안과 공포의 속삭임’으로 만들어 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받은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그 날에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대림절기가 시작되는 첫 번째 부활의 날에 그와 같이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과 교회만이 진정한 성탄의 의미를 깨닫고 복된 소식을 전할 수 있음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잠시 묵상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멘.

*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밤이 깊을수록 새 아침이 더 가까워지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항상 깨어 주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때 모든 성인들과 더불어 경배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1독서, 예레 33:14-16 / 2독서, 1데살 3:9-13 / 복음, 루가 21:25-36

* 2018년 12월 2일, 대림 1주일(First Sunday of Adv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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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8/12/03 01:07 2018/12/03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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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그리고 용산나눔의집과 길찾는교회. 우리는 같은 성서로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그 한계와 가능성을 깊이 반성하고 돌아보게 된 하루입니다.


——————

“새로운 관계와 세계로 나아가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주님의 가르침은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똑같이 적용됩니다. 이 가르침은 간통만 빼고 이혼을 금지합니다.”
- 대 바실리우스, <서간집> 188,9.,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Ⅲ>, 205쪽.

이 말은 교회의 스승 중 한 명이자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모두에게 ‘성인’이자 ‘교회박사’로 칭송받는 대 바실리우스가 오늘 복음서 말씀에 대해 해설한 부분입니다.

4세기에 활동했던 바실리우스 주교는 지금보다 훨씬 남성중심적인 고대 사회와 교회에서도 “주님의 가르침은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는 걸 강조했습니다.

그가 실제로 여성에 대해서 어떤 태도와 입장을 가졌든지 간에 “주님의 가르침은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똑같이 적용됩니다.”라는 말은 고대 교회가 주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하도록 안내했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실마리입니다.

전에도 몇 번 강조해서 말씀드렸듯이, 교회는 그 교회가 속해있거나 관계 맺고 있는 사회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 사회에 속한 미국성공회, 필리핀 사회 속의 필리핀성공회 그리고 한국 사회에 속한 대한성공회는 같은 성공회 공동체임에도 꽤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때문에 다른 사회에 비해 ‘성 평등과 정의’에 대해 더 많이 얘기하고 논쟁거리가 되는 미국 사회에 속한 미국성공회는, 기본적인 남녀평등은 물론 다양한 성에 대한 평등한 인식과 정의로운 입장을 갖는 걸 꽤 중요하게 여기며 고민하는 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필리핀 식구들이 자란 필리핀성공회나 지금 우리가 속해있는 대한성공회는 어떨까요?

보통 한 사회에서 어떤 특정한 이슈가 문제 자체가 안 되는 경우는 둘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 이슈가 충분히 소화되어 잘 작동하고 있는 편이거나, 아니면 아예 거론조차 될 수 없을 만큼 심각하게 나쁜 상태입니다.

4-5세기 고대 사회와 교회에서는 남장여자 수도사에 관한 이야기가 간간히 전해졌습니다.

주로 사회적·경제적 여건이 되는 여성들에게 가능했던 이야기지만, 당시 여성은 결혼이 자아실현의 대부분이었던 사회와 교회에서 그들은 ‘다른 세계’를 꿈꾸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여성들은 당시에 다양한 형태로 시작되던 ‘수도원 운동’이나 ‘순례 여정’에 각자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참여합니다.

안타깝게도 고대 사회와 교회에서는 ‘여성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남자 혹은 남자와 같은 여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런 남장여자 수도사들에 대한 이야기에서 ‘여성성’은 ‘유혹의 상징’처럼 이해되곤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여자임을 속이고 수도원 운동에 동참한 일부 여성들은 지나친 금욕생활로 ‘더 이상 여성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게 강조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사회적·경제적 여건이 되는 여성들은 끊임없이 ‘다른 세계’를 꿈꾸며 가부장중심적인 사회와 교회에서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갔습니다.

그 바탕에는 서두에 제가 인용한 대 바실리우스의 해설처럼 “주님의 가르침은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는 기본 입장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물론 여러 기록과 자료들을 살펴보면, 이런 입장은 당시 사회와 교회에서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자와 여자에게 주님의 가르침은 차별적으로 적용되었죠.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서가 전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억압적인 방향과 방식’이 아닌, ‘사랑과 해방을 향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자신들의 삶에 적용하며 금기에 도전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 오늘 1독서 창세기 말씀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신성한 결혼을 거쳐 아름다운 가정을 이룬다’는 이야기로 이해됩니다. 그들은 이것만이 하느님의 축복 가운데 있는 관계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는 같은 말씀이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 과거에 자신이 머물던 관계를 떠나 새로운 관계로 나아간다’는 이야기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향해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서로 깊이 존중하며 연결되는 새로운 관계야말로 하느님의 축복 가운데 있는 관계라고 이해합니다.

오늘 2독서인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이 그분을 위해서 있는 하느님’은 당신을 따르는 우리들이 당신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 겪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히브 1:10).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느님이 선물하는 사랑과 해방을 얻으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으로 안내하는 신비한 입구’가 됩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우리에게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으로 안내하는 신비한 입구’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리낌없이” 우리를 “형제자매”라고 부르신다는 겁니다(히브 1:11).

이처럼 성서가 기록하여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우리의 한계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그냥 고난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종이 아닌 형제자매로 대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형제자매로 대하는 건, 우리가 이 땅에서 그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이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땅에서 모든 생명들을 억압하는 관계를 가로질러 ‘사랑과 해방’이라는 새로운 관계와 세계로 나아가는 일에 동참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성서는 주님의 가르침이 문자에 갇히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성서는 주님의 가르침이 그 문자를 넘어 여러 은유와 비유 그리고 상징을 통해, 우리를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게 하는 디딤돌이자 문이며 길’이 된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니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매이며 형제인 여러분, 우리 모두 성서를 통해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누군가를 ‘억압하고 조정하는 방향과 방식’으로 악용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경계합시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과 해방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가르치며 살아갑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하시는 ‘새로운 관계와 세계’가 시작되는 놀라운 경험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강조하십니다(마르 10:15)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관계와 세계는 어린이처럼 ‘순진한 마음’, 다시 말해서 ‘두 팔을 활짝 벌린 환대와 사랑의 마음과 태도’를 통해서만 허락받는다는 걸 기억합시다.

오직 환대와 사랑으로 새로운 관계와 세계를 갈망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를 허락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잠시 묵상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멘.

* 본기도
주 하느님, 예수께서는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순결한 믿음으로 주님을 섬겨, 마침내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1독서, 창세 2:18-24 / 2독서, 히브 1:1-4, 2:5-12 / 복음, 마르 10:2-16

* 2018년 10월 7일, 연중 27주일(Seventeenth Sunday after Pentecost Proper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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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8/10/08 01:30 2018/10/08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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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는 물론, 최근 대다수 한국 교회는 혐오와 배제, 차별과 뻔뻔함이 뭔지 온 힘을 다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사회와 교회에서 상대적 약자일 수 있는 우리 공동체에게 질문을 던져 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 고백과 경험을 넘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 동참할 수 있을까요?

——————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끄럽게 여길 사람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우리 함께 오늘 복음서 말씀인 마르코의 복음서 8장 38절을 읽어 봅시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예수께서 필립보의 가이사이라 지방에 있는 마을을 향해 가다가 제자들과 문답을 나누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더냐?”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각자 들은 바를 이야기합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언자 중의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번엔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란, 히브리어 ‘메시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의 답변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향한 야훼 하느님의 메신저인 여러 예언자 가운데 한 명이 아니라, 더 특별한 존재라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놀라운 신앙 고백이자 찬양을 한 베드로가, 예수께서 죽임 당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알려주시자 그 놀라운 신앙은 온데간데없이 예수님을 말리느라 바쁩니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마르 8:32b)

베드로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 상반된 반응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 오늘 2독서인 야고보의 편지 3장 9-11절을 한 목소리 읽어 봅시다.

“우리는 같은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내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같은 샘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이 함께 솟아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교회는 종종 ‘일관되지 않은 상반된 언행’을 일삼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서 말씀이 기록하여 전하는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실상 베드로의 그리스도는 그저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경험 안에 갇힌 그리스도’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기억하며 전하는 그 위대한 예언자들보다 더 뛰어난 분이라 고백해놓고는,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막아서는 잘못을 범합니다.

오늘 복음서가 전하는 베드로는 자신의 신앙 고백과 경험을 넘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같은 입에서 상반된 고백과 반응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겠죠.

만약 베드로가 오늘 1독서인 이사야서가 기록하여 전하는 것처럼 “주 야훼께서 나를 도와주시니”라 고백할 수 있는, 그런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동행하는 이였다면 그는 같은 입으로 상반된 고백과 반응을 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 오늘 1독서인 이사야서 50장 7절부터 9절까지 함께 읽어 봅시다.

“주 야훼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어 차돌처럼 내 얼굴빛 변치 않는다.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줄 알고 있다. 하느님께서 나의 죄없음을 알아주시고 옆에 계시는데, 누가 나를 걸어 송사하랴? 법정으로 가자. 누가 나와 시비를 가리려느냐? 겨루어보자. 주 야훼께서 이렇게 나를 도와주시는데 누가 감히 나를 그르다고 하느냐?”

베드로가 이처럼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가졌다면, 그는 자신의 신앙 고백과 경험을 넘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 다른 반응을 보였을 겁니다.

‘아, 내 신앙 고백과 경험으로는 알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있구나. 그렇다면 그 길을 묵묵히 따르며 예수님께 ’하느님의 일‘에 대해 묻고 들어야 하겠구나.’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순간 ‘예수께서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2018년, 오늘 이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같은 질문을 하신다면 어떨까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 자신 있게 답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와 다르게 우리는 지난 2천 년의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해 놀라운 하느님의 은총과 역사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갑자기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경험과 신앙 고백을 뛰어넘는 길로 나아가겠다고 말씀하시면 어떨까요? 우리는 오늘 복음서가 기록하여 전한 베드로와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요?

교회가 2천 년 동안 가르치고 지켜온 신앙 고백이나 경험과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만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요?

2018년, 이 땅의 많은 교회는 이슬람 신앙을 지키는 난민이나 이주민, 성소수자 등 지금까지 자신들이 가르치고 지켜온 신앙 고백이나 경험을 넘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질문 앞에 당황하거나 매우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끄럽게 여길 사람들’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필리핀 신앙 공동체는 어떤가요? 우리가 용산나눔의집 이름으로 동행중인 대한성공회는 어떨까요?

아주 오랫동안 우리가 가르치고 믿어온 그 신앙 고백과 경험을 넘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 그 낯선 예수 그리스도의 질문 앞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들이 될 자신이 있나요?

우리, 오늘의 시편인 시편 116편 5절부터 9절까지 함께 읽어 봅시다.

“야훼께서는 너그럽고 의로우신 분, 우리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 미약한 자를 지켜주시는 야훼이시라. 가엾던 이 몸을 구해 주셨다. 야훼께서 너를 너그럽게 대하셨으니 내 영혼아, 너 이제 평안히 쉬어라. 내 영혼을 죽음에서 건져주시고 눈물을 거두어주시고 넘어지지 않게 보호하시니 내가 생명의 땅에서 야훼를 모시고 살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며 사는 사람들, 교회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사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시편 말씀처럼, 그 무엇보다 먼저 야훼 하느님께서 당신과 나를 너그러움과 의로움과 자비로 대하고 지켜주셨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 고백과 경험을 넘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질문에 겸손함과 정직한 태도로 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 묵묵히 동행해야 합니다.

이런 그리스도인과 교회만이 “같은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우리 모두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올 수 없다는 말씀을 꼭 기억합시다. (야고 3:9-10a)

우리 모두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잠시 묵상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멘.

* 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구하오니, 우리를 도우시어 서로 용서하며, 어떤 처지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며,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1독서, 이사 50:4-9상 / 2독서, 야고 3:1-12 / 복음, 마르 8:27-38

* 2018년 9월 16일, 연중 24주일(Seventeenth Sunday after Pentecost Proper 19).

(2018.09.15. pm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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