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투쟁하는 노동자는 항상 비장해야 하나요? 왜 해고 노동자는 힘들고 고생하는 이미지로 기억되어야 하나요?

11년째 싸우고 있는 KTX 해고 노동자 중 한 명인 지부장님께서 현장 증언에서 자주 하는 질문입니다.

투쟁이 비장하면 안 된다거나 해고된 삶이 힘들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싸웠고, 그 가운데 유연한 사고 방식으로 싸우면서 여기까지 견뎌 왔다는 고백입니다. 지칠 때마다 함께하는 이들이 있어서 다시 싸울 수 있었다는 증언입니다.

취업사기에 가까운 사측의 꼼수로 시작된 11년의 싸움.

다양한 방식으로 싸우는 이분들과 다양하게 연대해 주십시오. 현장에서도 밝고 힘차게 싸우는 이분들의 곁에서 밝고 힘차게 함께해 주십시오.

날이 추워졌습니다. 한분이라도 더 따뜻한 온기를 품고 함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실 수 없다면, 이 소식을 널리 공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요일 저녁 7시 30분, 서울역 3층 상설무대에서 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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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남겨진 사람들을 위하여”
- KTX 해고 승무원들의 온전한 복직을 위한 거리 기도회 -

*일시: 2017년 11월 29일, 12월 6일, 13일, 20일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30분
*장소: 서울역 3층 상설 무대
*주최: 성공회 길찾는교회, 나눔의집협의회, 정의평화사제단, 동양시멘트 투쟁승리를 위한 기독교대책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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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7/12/14 03:30 2017/12/14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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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몸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여성의 것입니다. 나도 당신도 교회도 국가도 아닌 그 여성이 그 몸의 주인입니다. 그 누구의 허락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만물 안에 깃드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성서를 주셨지만, ‘또 하나의 책’인 창조 세계와 이성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팎에 생동하는 하느님의 숨결이 존재하기에, 모든 사람은 ‘자주적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결정은 서로에게 다양한 영향을 주기에, 할 수 있는 한 토론하고 검토를 요청할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 없이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를 ‘악마화’하거나 ‘낙인’ 찍는 폭력적인 방식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특히 더 많은 힘과 영향력을 가진 그룹이 자신과 다른 의견과 지향을 가진 그룹이나 개인에게 그런 ‘낙인 찍기’ 방식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면, 한 명의 그리스도교 신자이자 성공회 사제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보수 개신교 그룹은 성소수자∙이슬람 반대 운동에 앞장서고, 천주교회는 임신중단권 반대 운동에 앞장서는 현실. 2017년 한국 그리스도교의 민낯입니다.

보수 개신교 그룹은 성소수자나 이슬람 신자들의 권리와 삶을 이성애자나 비이슬람 신자들이 결정하겠다고 우깁니다. 천주교회는 여성들의 권리와 삶을 자신들이 결정하겠다고 우깁니다. 대체 누가 이들에게 누군가의 권리와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했나요.

제가 동행하며 삶의 이야기를 속삭여주는 신은 그런 권리나 힘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신이 아닌데, 신이 되려는 시도는 항상 위험합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종교는 사회를 ‘통제하는 기구’가 아닙니다. 그런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할 때에 왜곡되고 부패했던 과거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사회와 ‘동행’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렇게 서로에게 배우며,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 상대적 약자와 사회적 소수자를 존중하고 옹호하는 ‘또 다른 길’이어야 합니다.

여러 이유로 임신중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여성을 “끔직한 폭력이자 일종의 살인행위”를 저지른 사람으로 ‘낙인’ 찍은 한국 천주교회 염 추기경님의 신학과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폭력을 행하고 있는가. 누가 살인을 조장하는 ‘진짜 범인’일까. 우리는 제대로 질문해야 합니다.

그런 선택을 죄로 만들고 구조화하는 권력화된 남성 중심의 ‘이성애가부장제’를 언급하지 않고, 임신중단권에 대한 논의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며 폭력과 살인행위로 몰아가는 일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한 개인의 삶을 이성애가부장제 중심의 사회에서 통제하려하고, 문제나 해결은 연약한 한 개인의 몫으로 넘겨버리는 이 땅의 주류 극우 세력과 공명하는 종교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삶은 개인적으로, 해결은 사회적으로’ 라는 지향과 태도로 사회와 소통하며 또 다른 해법을 모색하는 종교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 일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

[연합뉴스] 천주교, 낙태죄 폐지 반대 100만인 서명운동 개시
- 염수정 추기경 “낙태는 끔찍한 폭력이자 일종의 살인행위”
송고시간 | 2017/12/03 15:22

[월간조선] ‘낙태죄 폐지’ 주도하는 천주교 신자 이정미·심상정 의원(정의당)
- 한국천주교회 일부 사제 “이들 의원이 소속된 본당 신부, 신자 재교육 시켜야”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 입력 : 2017.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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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7/12/13 02:38 2017/12/13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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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우리에게 기쁜 소식으로 오시는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우리 함께 1독서에서 한 부분을 읽어 봅시다.

“너, 시온아. 높은 산에 올라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 너, 예루살렘아. 힘껏 외쳐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질러라. 유다의 모든 도시에 알려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저기 오신다.” (이사 40:9)

지난주 일요일부터 시작된 대림절기는 ‘오심을 기다리는 때’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 오심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 그러니깐 구약에서 선포된 예언의 완성인 신약을 강조하는 마르코의 복음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이란 표현으로 시작됩니다(마르 1:1).

이렇게 우리는 대림절기에 펼쳐 읽는 마르코의 복음서에서 강조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 구약에서 강조하는 ‘우리에게 기쁜 소식으로 오시는 야훼 하느님’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복음 말씀은 구약의 예언자인 이사야와 말라기를 인용하며, 그들이 ‘주님의 길’을 예비한 존재라고 강조합니다(마르 1:2-3).

이처럼 오래 전부터 약속된, ‘우리에게 기쁜 소식으로 오실 하느님’이 오시는 그날은 모든 사람에게 복된 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2독서인 베드로의 둘째 편지 3장 10절부터 11절 앞부분까지 함께 읽어 봅시다.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갑자기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천체는 타서 녹아버리고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다 파괴될 것이니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도둑처럼 갑자기 오는 날, ‘우리에게 기쁜 소식으로 오시는 하느님’이 오시는 그날은 우리가 그토록 믿고 기다리던 하느님의 약속이 이뤄지는 날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정의가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나는 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의가 깃들여 있습니다.” (2베드 3:13)

그러니 하느님의 정의가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느님의 정의가 없는 옛 땅에서 행복한 사람들에게 평화로울 수 없는 곳입니다.

하느님의 정의 없이도, 지금 이대로 별 문제 없이 행복한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정의가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의미에서 ‘저주이자 죽음’을 뜻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대로 아무 문제없는데, 왜 새 하늘과 새 땅 같은 게 필요할까요.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이 간절한 사람들은 지금 이대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정의가 간절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렇게 강조합니다. 2독서 가운데 한 부분을 함께 읽어 봅시다.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그 날을 기다리고 있으니만큼 티와 흠이 없이 살면서 하느님과 화목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도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2베드 3:9, 14-15)

그러므로 하느님의 정의가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이 간절한 사람들은 그들 먼저 “티와 흠이 없이 살면서 하느님과 화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과 세계가 하느님과 화목한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 되도록 해야만 합니다. 왜냐면 하느님의 정의가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지금 이 땅에서 하느님 없는 것처럼 살아도 아무 문제없는, 하느님과 화목하지 않아도 별 문제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구원받기를 바라며 오래참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들조차 하느님과 화목하게 되어 그들에게도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는 날이, 바로 하느님의 정의가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이 임박한 날입니다.

오늘 시편 말씀인 85편 1절에 의하면, 우리가 마주할 새 하늘과 새 땅은 마치 귀양살이 갔던 아들이 돌아오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화목하는 사람들은 오늘 시편이 노래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영광,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정의가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됩니다.

오늘 시편을 함께 읽어 봅시다.

“야훼여, 당신 땅을 어여삐 여기시어 귀양살이 야곱을 돌아오게 하시고 ... 나는 듣나니, 야훼께서 무슨 말씀 하셨는가?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 그것은 분명히 평화, 당신 백성과 당신을 따르는 자들, 또다시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않으면 그들에게 주시는 평화로다.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정녕 가까우니 그의 영광이 우리 땅에 깃들이시리라.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땅에서는 진실이 돋아 나오고 하늘에선 정의가 굽어보리라. 야훼께서 복을 내리시리니 우리 땅이 열매를 맺어주리라. 정의가 당신 앞을 걸어 나가고, 평화가 그 발자취를 따라가리라.” (시편 85:1, 8-13)

그러니 우리는 적극적으로 그날이 속히 오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느님의 심판 날을 기다릴 뿐 아니라 그 날이 속히 오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2베드 3:12a)

그렇게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도록 오래 참으시는 하느님과 함께, 한 사람이라도 더 하느님과 화목한 사람이 되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율법의 상징인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려고 왔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은총을 베풀러 오셨습니다.”
- 암브로시우스 <서간집>(스투디우스에게 보낸 편지) 68,7.,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Ⅲ>, 65쪽

교회의 스승인 암브로시우스의 말을 빌리자면, 하느님의 정의가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이들에게는 회개의 세례를, 어떤 이들에게는 은총의 세례를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게 세례자 요한이 증언한 ‘그분이 성령으로 베푸는 세례’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일하시는 성령님과의 동행을 의미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가난과 불평등, 개인을 넘어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죄악에 신음하는 성령님과 깊이 공명하는 ‘회개와 은총’을 선물 받게 될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없이, 하느님과 화목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없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 땅에서 행복한 사람들. 그들을 하느님의 정의가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에서만 평화를 만날 수 있는 사람들로 살도록 안내할 수 있는 힘은 오직 성령님과의 동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대신해서 간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성령의 생각을 잘 아십니다.” (로마 8:21-27)

우리 모두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잠시 묵상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멘.

* 1독서, 이사야 40:1-11 / 2독서, 2베드 3:8-15상 / 복음, 마르코 1:1-8

* 2017년 12월 10일, 대림 2주일(Second Sunday of Advent)

——————

대림절기는 ‘희망’을 의미하죠. 그런데 저는 ‘어떤 사람들’에게 희망인지 묻게 됩니다. 제가 동행하는 용산나눔의집 미등록 이주노동자 식구들 대부분은 희망이 간절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어떤 희망을 전해야 할까요. 모든 사람에게 희망이 되는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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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7/12/11 01:49 2017/12/11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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