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작고 약한 사람들의 비명 같은 저항을 비웃는 듯한 판결들.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이 계속 그렇게 작동하는 사회와 교회 구조.

이런 사회와 교회에서 많은 걸 가지고 살아가는 40대 남성이라는 게 부끄러워지는 날들.

‘다른 이야기와 선택들’이 가능하도록 지금 연대하는 일들에 좀 더 힘을 실어야 하겠다는 다짐 외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무기력과 안타까움.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들’은 분명 있다. 최소한 내가 속한 조직과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더 작고 약한 사람들의 비명 같은 저항’이 무시되거나 억압 당하지 않게 소리내고 행동하는 일들.

나부터 그런 사람이 되지 않고, 그런 선택들을 모른 척하지 않기 위해 계속 경계하기.

우리가 서로 이어져 있다는 걸 자각하고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서로의 힘이자 싸움의 이유가 될 수 있다.

편파적이고 억울한 판결들 때문에 당신이 소리내어 울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세계는 나에게도 분명 ‘해로운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따위 사회와 교회를 그냥 두고서는 당신과 내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2018.08.14. 오후 2:45 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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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9 03:49 2018/08/19 0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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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내어주신 하느님과 우리들의 끙끙거림이 만나는 성찬의 자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우리 함께, 오늘의 시편인 34편을 읽어봅시다. 저와 번갈아가며, 제가 홀수 절을 읽고 여러분이 짝수 절을 읽으면 됩니다.

1 나 어떤 일이 있어도 야훼를 찬양하리라. 주를 찬양하는 노래 내 입에서 그칠 날이 없으리라.
2 나의 자랑, 야훼께 있으니 비천한 자들아, 듣고 기뻐하여라.
3 나와 함께 "야훼, 높으시도다." 노래부르자. 모두 소리 맞춰 그 이름을 기리자.
4 야훼 찾아 호소할 때 들어주시고 몸서리쳐지는 곤경에서 건져주셨다.
5 그를 쳐다보는 자, 그 얼굴 빛나고 부끄러운 꼴 당하지 아니하리라.
6 가엾은 자의 부르짖음을 야훼, 들으시고 곤경에서 건져주셨다.
7 야훼의 천사가 그를 경외하는 자들 둘레에 진을 치고 그들을 구해 주셨다.
8 너희는 야훼의 어지심을 맛들이고 깨달아라. 그에게 피신하는 자는 복되다.

방금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에서도 노래하고 있듯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신앙은 공통적으로 ‘신에게 의지하는 삶’을 강조합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칠 때에 신에게로 피신하는 삶’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신앙은 삶에 별 문제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체감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 이유로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고, 스스로의 능력으로도 많은 걸 얻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 크게 아쉬울 것 없이 일상의 즐거움과 축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신앙 고백은 그저 ‘연약한 사람들의 끙끙거림이나 비명’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오랜 시간 일관되게 반복해서 가르쳐 왔습니다.

우리가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연약한 사람들의 끙끙거림과 소리 없는 비명에 적극적으로 응답하기 위해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다고 강조합니다.

우리, 오늘 복음서 가운데 한 구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b)

요한의 복음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육성으로 선언되었다고 기록하여 전하는 이 말씀은 당시 유다인들을 당혹스럽게 했습니다. 우리, 요한의 복음서 6장 41절부터 42절까지 함께 읽어봅시다.

“이 때 유다인들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신 예수의 말씀이 못마땅해서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터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니 말이 되는가?’”

지난주 요한의 복음서 말씀 가운데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b) 라고 요청했던 제자들을 기억하시나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을 준다.” 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그렇다면, 그 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십시오.’ 라고 요청했습니다(요한 6:32-34).
결국 오늘 요한의 복음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바로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오늘 말씀 가운데 6장 50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 봅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50a)

이처럼 요한의 복음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빵이자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임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께서 주신 빵이자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으로 만난 제자들은 이후 초기 신자들과 교회에게 ‘너희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느님께서 주신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되어 살아라’고 가르칩니다.

우리, 오늘 2독서인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5장 2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 봅시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여러분은 사랑의 생활을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셔서 하느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연약한 사람들의 끙끙거림과 비명에 응답하여 자신을 내어주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를 본받아 자신을 내어주며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

그리고 우리가 오늘날 반복하며 함께 하는 ‘성찬 식탁을 나누는 이 자리’가 이처럼 하느님이 먼저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 주셨음을 기억하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신 하느님을 만나고자 이 자리로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허락된 은총을 맛보는 자리입니다.

무엇보다 이 은총의 시간과 공간으로 나오는 조건은 그저 이 자리로 나오고 믿는 것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하느님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요한 6:35b).

우리들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먼저 내어주셨음을 ‘온 몸과 삶을 통해 믿고’ 그 내어주신 은총을 먹고 마시기 위해 ‘한 걸음 나아가는 행함’은 우리들이 영원한 생명 가운데 동행할 수 있도록 하는 디딤돌이자 힘입니다.

그리고 친히 우리를 위한 ‘영원한 생명의 초대장’이자 ‘죽음의 늪에서 벗어나는 디딤돌’이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랑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닮으십시오. 그리스도를 본받아 여러분은 사랑의 생활을 하십시오.”(에페 5:1-2a)

그런데 이때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초대를 믿고 응하기만 하면, 다시 말해서 그 디딤돌 위에 서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되리라는 ‘무모하고 무책임함 기대’입니다.

“마지막 날에 여러분을 해방하여 하느님의 백성으로 삼으실 것을 보증해 주신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여드리지 마십시오.”(에페 4:30)

우리는 이제 막 하느님의 성령을 통해 ‘보증’받았을 뿐입니다. 각자의 신앙 전통과 이야기에 따라 그 보증을 어떻게 경험하고 인식하든 간에, 우리는 그 보증에 힘입어 다시 사회와 사람들 가운데로 보내진 사람들입니다.

그처럼 이제 막 ‘출발선’에 선 사람들이 이미 ‘결승점’을 통과한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우리는 이미 결승점을 통과한 ‘완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조금 세게 말하자면, 이제 막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일 뿐입니다. 이제 막 디딤돌에 발을 디딘 사람들일 뿐입니다.

이제 겨우 출발선에 섰으니, 모든 게 낯설고 실수투성이에 문제와 부적응의 연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2독서 말씀에서 우리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건, 다음과 같은 말씀입니다. 2독서 가운데 4장 25절부터 29절, 31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 봅시다.

“그러므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 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 도둑질하던 사람은 이제부터 그런 짓을 그만두고 제 손으로 일하여 떳떳하게 살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하십시오 ... 모든 독설과 격정과 분노와 고함 소리와 욕설 따위는 온갖 악의와 더불어 내어버리십시오.”(에페 4:25-29, 31)

‘거짓말, 화, 악마가 발붙일 기회, 도둑질, 남을 해치는 말, 독설, 격정, 분노와 고함소리와 욕설, 온갖 악의’ 등과 같은 목록은 이제 하느님의 초대장을 움켜쥔 사람들, 그리스도 예수라는 디딤돌을 디딘 사람에게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목록입니다.

그러니 어서 이런 것들로부터 벗어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이런 목록과 ‘아무 상관없게 될 것입니다’라는 선언이 아닙니다.

‘당신들도 쉽게 저지르게 될 이런 것들과 계속 싸워 그것들에 사로잡혀 살지 마십시오’라는 권면이자 가르침에 가깝습니다. 순간적으로 그런 잘못을 범할지라도 계속 그런 것들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계속’ 도전하고 싸우라는 가르침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맛보고 나누며 산다는 건, ‘나는 이런 죄의 목록들과 아무 상관없다’는 선언들을 남발하며 ‘거짓과 위선’에 빠져 사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런 죄의 목록들과 무관하지 않은, 아니 무관할 수 없는 문제 많고 한계 가득한 삶을 사는 신자들과 교회임을 고백하는 게 우선입니다.

앞으로도 그런 죄의 목록들과 계속 싸우고, 영성적 힘을 길러 그것들과 점점 멀어져야 한다는 권면과 다짐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를 반복하여 확인하고 그런 삶으로 나 자신과 내 이웃, 우리 서로를 초대하며 확인하는 자리가 바로 성찬의 자리입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신 하느님, 그 약속이자 상징인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가운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닮아가는 신자들과 교회가 됩니다.

그 성찬 식탁의 자리에 나아와 참여함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자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이어지는 신비에 동참할 때, 우리는 오늘 1독서가 전하는 예언자 엘리야의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모든 걸 포기한 채, 빈손이 되어 더 이상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이제는 더 살아야 할 이유와 힘조차 잃어버린 연약한 사람의 끙끙거림과 소리 없는 비명에 응답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당신과 나, 우리와 같은 사람들의 힘겨운 끙끙거림과 소리 없는 비명에 응답하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제 저는 그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또 한 번 맛보고 깨닫기 위해 당신을 성찬의 식탁에 초대합니다.

우리 모두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잠시 묵상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멘.

* 본기도
주 하느님, 오직 주님만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세상의 헛된 만족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1독서, 열왕상 19:4-8 / 2독서, 에페 4:25-5:2 / 복음, 요한 6:35, 41-51

* 2018년 8월 12일, 연중19주일(Twelfth Sunday after Pentecost Proper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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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2 23:04 2018/08/12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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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빈손

용산 나눔의집 사무실에서 늦은 밤 일을 하다가 잠시 창으로 눈을 돌리면 보이는 스테인드글라스.

작가님께 기본 디자인을 드리며 이 스테인드글라스를 의뢰했을 때엔 이것저것 많은 의미를 떠올렸지만, 한참 일에 빠져 있다가 문득 이 창을 보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의외로 단순 명료한 문장.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인생을 기억하라’.

오늘따라 더 무게 있게 다가오는 문장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사순절기가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신자들의 이마에 재를 바르며 이렇게 선언한다.

‘인생아 기억하라,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그래. 그러니, 뭐 대단한 척 살지 말자. 스스로를 쉽게 깎아내리거나 상처주지도 말자. 지금 감당해야 할 하루의 무게와 한 사람과의 만남에 충실하자.

내 앞에 있는 당신과 나는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같은 존재의 사람임을 기억하자. 그러니 우리 서로에게 비굴할 필요도 잘난 척할 이유도 없다.

이렇게 당신과 나의 또 하루가 채워져 지나간다.

* 덧. ‘빈손’ 스테인드글라스의 의미 ^^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사람의 빈손. 용산나눔의집이 동행하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빈손. 신을 만나고 이웃을 마주하기 위한 빈손.

우리네 삶과 영혼에게 가장 필요한 상태인 빈손. 때로 우리가 움켜쥔 것을 놓을 때에 가장 유익한 것으로 채워주시는 신의 손을 잡을 수 있으니, 그게 바로 빈손이 상징하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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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1 23:50 2018/08/11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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