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비슷한 답을 하게 된다.

그리스도교 역사와 전통에서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주장했던 것만큼, ‘종교는 어떤 정치를 말하고 참여해야 하는가’를 성찰하고 논하기도 했다.

‘정교분리의 원칙’이 물러섬에 대한 성찰이라면, ‘어떤 정치를 말하며 참여하는가’는 다가섬과 동행에 대한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후자는, 우리의 일상에서 정치가 아닌 것이 없다는 이해에 근거한다.

‘누구의 편에서 무엇을 위한 정치를 말하고 지지하며 참여하는가.’

2017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사회와 함께 고민하고 성찰하며 답해야 한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가 4:18-19)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불의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모든 종류의 폭력에 도전하며,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합니다.”
(To transform unjust structures of society, to challenge violence of every kind and pursue peace and reconciliation.)
- 성공회 선교정신(THE 5 MARKS MISSION) 가운데 네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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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1 18:24 2017/03/21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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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님의 문답에 관한 복음 본문이 나오면, “사마리아 여자의 이름을 찾아서” 라는 제목으로 말씀 나눔을 하고 싶었다.

헌데 지난 주 말씀 나눔 이후에, 이주민 신앙 공동체에서 요한의 복음서 3장 16절 말씀에 근거한 질문이 있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는 말씀에 근거해서 ‘복음적 신앙’을 사는 게 중요하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용산 해방촌 나눔의집 이주민 식구들은 그 삶의 자리가 ‘사회적 소수자’이더라도, 신앙의 자리는 ‘열린 복음주의’인 경우가 많다. 당연한 얘기지만, ‘사회적 소수자 = 진보적 신앙’일 이유는 없으니 ^^

그래서 이번 주 말씀 나눔은 그 부분에 대해 좀 더 초점을 맞춰 답하는 방향으로 준비했다.

1. 우리들의 갈망을 채우는 진정한 길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형성이라는 게 성서와 초기 교회의 가르침이다.

2.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지속시키는 길이 진정한 영적 예배다.

(여기까지는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이죠 ^^ )

3. 그런데 그 영적 예배는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을 믿고 붙들며 살거나, ‘주일성수’와 같은 것으로 드려지는 게 아니다.

4. 그 영적 예배는 우리들의 일상 가운데, ‘사람이 되신 하느님’인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선언하고 보여주신 그 길을 따라 살아갈 때에 드릴 수 있다.

5. 다시 말해 ‘우리들의 하느님’은 교회 울타리 안에 갇혀 예배 받으시는 분이 아니다. 진정한 영적 예배는, 세상과 이웃을 섬기는 교회이자 신자로서 지극히 작은 사람들을 주님 대하듯이 여기는 것이다. 이 시대와 이 땅의 억눌린 사람들, 눈먼 사람들, 묶인 사람들, 가난한 이들과 함께 동행하고, 그 가운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는 것이다.

아무튼 오늘은 이 맥락에 맞춰 말씀 나눔하느라,

‘어둔 밤에 예수를 찾아온 유대인 지도자 니고데모’와 ‘밝은 낮에 예수가 찾아간 이름 없는 사마리아 여인’을 비교하거나, ‘사마리아 여자에 대한 몇 가지 편견’에 대해 초점을 맞춘 말씀 나눔은 3년 뒤로 미뤄 둘 수밖에 없게 됐다 ㅎㅎㅎ

아, “사마리아 여자의 이름을 찾아서” 라는 제목도 3년 뒤로 ㅋㅋㅋ

* 덧. 아래는 설교문이니, 관심 없는 분들은 그냥 넘어가셔도~ ㅎㅎ


“여인의 갈망. 우리의 갈망.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 2017년 3월 19일, 사순 3주일(Third Sunday in Lent) * 1독서, 출애 17:1-7 / 2독서, 로마 5:1-11 / 복음, 요한 4:5-42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전통적으로 사순절기에 금욕과 절제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갈망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식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의식주의 해결이나 관계와 사회에서의 성공이 우선적인 가치나 지향이 될 수밖에 없는 우리 일상을 잠깐씩 멈추고 돌아보라는 신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순절기의 금욕과 절제는 우리의 갈망을 식별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의 사순절기는 그런 금욕과 절제 자체가 ‘절대선’이나 ‘목적’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엔 말 그대로 주객이 뒤바뀐 겁니다. 도구가 목적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는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님의 만남이 전해집니다. 그 만남에서 이어진 대화에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의 갈망’을 꿰뚫어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사마리아 여자의 갈망이 채워질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유다인이 이방인처럼 대하던 사마리아인에게 말을 거시고 도움을 청합니다. 당시 경건한 유다인이라면 지켜야할 관습이나 금기에 얽매이지 않고 넘어섭니다. 요한의 복음서는 예수님을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분으로 묘사할 때가 많습니다(요한 2:25). 그리고 그렇게 꿰뚫어 본 사람들의 마음에 담긴 질문에 핵심을 담은 답을 주시거나, 그 질문에 응하는 기적을 보여주시어 사람들이 의심을 뛰어넘도록 이끌기도 하십니다. 오늘 이야기에서도 예수님은 당신께서 꿰뚫어보신 ‘사마리아 여자의 갈망이 어떻게 채워질 수 있는가?’에 집중하십니다. 이를 전하는 성서와 초기 교회도 이 질문과 답을 가장 우선시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진정한 예배에 대한 논쟁’이 등장합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해석과 전통에 따라 그리짐 산에서 야훼께 예배를 드렸는데, 예수님과 문답을 주고받던 사마리아 여자가 이에 대해 묻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 해석과 전통에 대해 간략하게 짚어주십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자의 갈망이 채워질 진정한 예배, 그런 예배는 그들의 해석과 전통의 차이를 넘어서 어떤 규칙이나 공간에 갇히지 않는 ‘영적 예배’를 드리는 게 되리라고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십니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 드려야 한다.” (요한 4:24)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영적인 예배란 무엇일까요? 첫째,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배는 말 그대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뜻합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관계가 계속 지속되는 것이 예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오늘 2독서인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둘째, 영적인 예배란 하느님과의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지, 그 관계를 돕는 것들을 예배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에 쉽게 반복할 수 있는 실수나 잘못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갈망, 그렇게 우리 각자가 지금 이 순간에 간절히 해결되길 바라는 것들이나 채워지길 원하는 것들을 예배하기 쉽습니다. 또는 영적인 하느님, 다시 말해서 보이지 않거나 쉽게 규정될 수 없는 하느님이 아닌, 그 하느님을 알게 하거나 경험하게 해주는 ‘신적인 상징이나 경험들’을 예배하기 쉽습니다. 종교적 상징물이나 공간, 심지어는 성서의 문구나 해석들, 특별한 신앙적 경험이나 기도의 방식들이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전통적인 예배당도,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놀라운 성서의 문구도, 우리를 특별한 신앙적 체험이나 유대감으로 이끄는 여러 기도의 방식도 하느님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느님, 보이지 않고 쉽게 규정될 수 없는 하느님을 향하도록 안내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 이상의 의미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가 정한 과거의 해석이나 규칙 안에 갇히는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 성공회는 ‘기도서의 교회’라고 불립니다. 그만큼 예배와 일상에서 기도서나 교회력과 같은 규칙과 약속들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우리가 그런 규칙과 약속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뭘까요? 그건 한 개인의 갈망에 의해 하느님과의 관계, 나아가 그 하느님을 통한 나 자신과 우리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가 쉽게 왜곡되지 않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너무 과장되지도 너무 과소평가되지도 않게 하는 ‘좋은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라는 핵심 자체를 억누르거나 해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자의 갈망을 통해, 우리의 갈망이 해결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마을 사람들에게 달려간 사이에 이뤄진 제자들과의 문답을 통해, 우리가 먹어야 할 진정한 양식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라는 걸 한 번 더 강조하십니다. 우리 갈망이 해소되는 진정한 길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지속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십니다. 이를 전하는 게 바로 선교이자 복음의 핵심이라고 확인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대해, 수많은 교회가 강조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요한 4:36). 수많은 교회와 지도자들이 그 영원한 생명의 나라, 그 하느님 나라에 많은 알곡들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하느님 나라가 선교의 이유이고 핵심이라고 강조합니다. 그 하느님 나라의 다스림이 이 땅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그 다스림의 내용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34 그 때에 그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36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 37 이 말을 듣고 의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마태 25:34-40) 사순절기의 금욕과 절제이든 진정한 예배이든 하느님 나라의 다스림이든, 우리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지속하며 살기 위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목적과 도구를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주객을 뒤바뀌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사순절기의 금욕과 절제는 우리 모든 사람들이 품고 사는 갈망을 무엇을 향해야 하며, 어떻게 채워질 수 있는지에 대해 식별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뜻하는 예배, 그 예배를 돕고 안내자 역할을 하는 도구들이 예배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지켜지는 걸 뜻하는 ‘복음’이고, 그 복음을 전하는 게 ‘선교’라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그 핵심은 잊혀지고, 오히려 우리의 갈망이 잘못된 방식으로 채워지는 게 복음인 것처럼 왜곡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세와 교인의 숫자가 늘어가는 것이 선교라는 식으로 곡해되어서도 안 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사마리아 여자의 갈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우리의 갈망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처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지속되는 것이 복음이며, 그 복음을 전하는 게 선교이며 전도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며 실천하여 하느님의 나라에 속하는 ‘의인’이라 불리려면,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마태 25:40). 무엇보다 우리의 갈망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지속시키는 이름인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따르는 가운데 해소될 수 있습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는 그 갈망이 해결되는 구체적인 선언이자 길이기 때문입니다. “18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19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가 4:18-19) 그런데,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이 시대와 이 땅의 억눌린 사람의 자유를 외면하고, 눈먼 사람의 치유를 모른 척하며, 묶인 사람들의 해방이 무엇인지 모르며, 가난한 이들에게 실질적 복음을 전하는 걸 특별한 사람들의 일처럼 여긴다면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을 따르며 그 길 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할 자격이 있을까요?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와 이 땅의 억눌린 사람들, 눈먼 사람들, 묶인 사람들, 가난한 이들과 함께 동행하고 있나요? 그들의 갈망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안내하고 머물 수 있도록 돕는 게 아니라 이용만 한다면,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뭐라고 하실까요? 우리 모두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잠시 묵상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멘. * 본기도(Collet)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목마른 이들에게 영원한 생수를 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이제 헛된 갈망에서 벗어나 주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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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9 23:23 2017/03/19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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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찾는교회는 초기부터 끊임없이 한국 교회와 사회를 향해 질문하는 게 있습니다. 그건 바로 ‘다양한 형태와 맥락의 가난’에 대한 질문입니다. 기본적으로 경제적 가난에 대한 질문이며, 소외와 배제 그리고 차별의 대상이 되는 여러 형태와 맥락의 가난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형태와 맥락의 가난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그 가난을 재생산하는 구조와 문화 등에 대해 말하지 않는 교회가 ‘진짜 질문’을 하고 있는 걸까요?

대다수 한국 교회와 사회는 ‘물질적 축복과 성공’은 신의 은총으로 칭송하고 온갖 헌신과 헌금을 요구합니다. 또한, 그 반대의 가난과 실패는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매도하는 교회와 사회에 대해 분노하며 싸우지 않는 교회와 신자 또한 넘쳐 납니다. 그들은 ‘제대로 된 질문’을 하고 있는 걸까요? 한국 교회와 사회 안에 넘쳐 나는 소외와 배제, 차별의 반복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 교회와 신자’는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 걸까요?

성서와 교회의 증언과 가르침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뜻이 땅에 임하는 게 하느님 나라’라고 가르칩니다. 그 신앙 고백의 정수가 바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죠(성육신, Incarnation). 그리고 우리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며 따른다면, ‘하늘의 정의와 평등에 기반한 사랑’이 이 땅에도 이뤄지는 과정에 함께하겠다는 ‘동참 선언’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에서 요청하는 신자의 세례’입니다.

그런데 이 땅의 구조적 불평등과 불공정, 부조리에 침묵하면서 교회의 유지와 성장에 필요한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만 ‘골라서’ 따른다면, 그걸 어떻게 ‘그리스도교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길찾는교회는 초기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한국 교회와 사회의 다양한 형태와 맥락의 가난’에 대해 질문할 겁니다. 그 소외와 배제, 차별의 대상이 되는 사회적 소수자와 상대적 약자와 동행하며 연대할 수 있는 길 찾기를 게을리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에겐 이것이 바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따르는 길이고,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이뤄지는데 동참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정직한 질문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유효한 답을 찾는데, 교회가 모든 걸 알고 있으며 정답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와 사회가 함께 질문과 답을 찾는 게,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그 자체로 완결 구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회와 함께 질문하며 고민과 성찰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런 ‘상호연동성’을 제대로 이해할 때에 코끼리 뒷다리 긁는 식의 헛발질이나, 불안과 공포 마케팅을 이용한 한국 교회의 생존 방법이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아니, 그렇게 달라져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 덧. 얼마 전에 인터뷰에 응하며, ‘당신은 길찾는교회와 동행한다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길찾는교회와 동행하며 어떤 질문을 하는가?’ 라는 질문을 받았다.

덕분에 가끔 응하던 이런저런 인터뷰 사전 Q&A를 살펴 봤다. 그리고 내가 반복적으로 질문받고 답하던 질문이란 걸 알게 됐다. ‘정직한 질문으로 존재하는 교회’. 내가 길찾는교회와 동행하며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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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8 03:40 2017/03/18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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