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모독하는 사람. 하느님이 부르시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우리, 오늘 2독서인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4장 13절부터 15절까지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라는 말씀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이와 똑같은 믿음의 정신을 가지고 믿고 또 말합니다. 그것은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우리를 그분 곁에 앉히시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두 여러분을 위한 것으로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서 하느님께 영광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똑같은 믿음의 정신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을 살고 하느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됨 등을 어떻게 믿게 되셨나요?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만 해도 그렇지만, 우리 각자가 고백하고 이해하는 믿음은 많이 다릅니다.

그걸 드러내고 토론하다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똑같은 믿음의 정신을 가지고 있음을 고백할 수 있는 걸까요? 주님의 부활이나 하느님 나라처럼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어떻게 믿게 되는 걸까요?

교회와 성서는 이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하는 존재가 바로 성령님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 함께, 교회의 스승인 오리게네스의 말을 읽어봅시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의 힘이 이 세상 모든 피조물 안에서 작용하고 있지만(로마 1:20), 거룩한 사람들만 성령에 참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10; 참조. 갈라 6:8). 그래서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고린 12:3)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오리게네스 <원리론> 1,3,7.,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Ⅲ>, 107쪽.

이처럼 우리가 서로 다른 신앙 고백과 실천을 하며 사는 사람들일지라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며 그 고백을 실천하며 산다면 우리는 “거룩한 사람”으로 성령의 초대에 응한 사람들입니다.

때로 우리 사이에 크게 느껴지는 차이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고백과 실천 앞에서는 그리 크지 않을 수 있다는 게 교회와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며 실천하느냐’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이자 기준이 됩니다.

그 고백과 실천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나된 식구’임을 확인해주는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오늘 복음 말씀인 마르코의 복음서 3장 33절에서 35절까지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시고 둘러앉은 사람들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이 땅에 교회가 형성된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온갖 문제 가운데에도 교회와 성서가 흔들리지 않고 강조하며 가르친 게 있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가 방금 한 목소리로 읽은 복음 말씀처럼, 우리는 혈연이나 지연이나 세대나 성별이나 그 어떤 인연과 기준으로 서로를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칭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는 오직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나된 식구’라고 믿고 고백하며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교회와 성서를 통해 전하도록 하신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더러운 악령이 아닌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사로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믿음과 고백 그리고 실천’을 기준으로 삽니다(2고린 4:18).

또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지상의 것들에 의지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나된 식구’를 “하느님께서 세워주시는 집”처럼 여기며 삽니다(2고린 5:1).

우리들의 하느님은 매순간 이런 사람을 찾고 부르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하지만 우리는 작고 연약하여 매순간 눈에 보이는 것들과 우리 손으로 지은 것들을 찾고 의지합니다. 그게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익숙하고 편한 관습 안에 갇힌 사람은 “너 어디 있느냐?”고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그에 비해,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한 것들 너머에 계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 너머에서 하느님이 부르시는 소리를 듣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이란, 이처럼 익숙하고 편한 관습에 갇혀 하느님을 그렇게만 이해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 너머에 계신 하느님을 자신이 머물러 있는 ‘익숙하고 편한 관습’ 안에 가두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쯤에서 교회의 스승인 오리게네스의 가르침을 함께 읽어봅시다.

“... 그러나 성령에 참여하기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던 사람이 배교하여 성령에게서 등을 돌리면, 바로 이런 행위를 두고 성령을 모독했다고 합니다.”
- 오리게네스 <원리론> 1,3,7.,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Ⅲ>, 107쪽.

그렇게 자신에게 익숙하고 편하며 좋은 것들 속에 하느님을 가둬 놓고 등을 돌렸으니, 더 이상 그는 하느님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익숙하고 편하며 당연한 것들에 머물러 “너 어디 있느냐?”고 부르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생각이 없습니다.

혹시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하며 좋은 것들 안에 하느님을 가둬놓고 등을 돌린 채 ‘하느님을 잘 안다’라고 떠드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사실은 우리에게 참된 하느님을 알려주는 성령님을 모독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하며 좋은 것들 안에 가둔 하느님, 그 거짓 우상을 하느님으로 포장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확인했듯이,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부르시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하며 좋은 것들 안에 하느님을 가둔 사람은 “너 어디 있느냐?”고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우리들의 하느님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하며 좋은 것들 너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 말씀에서 확인한 것처럼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한 여러 인연과 기준을 넘어 설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나된 식구’를 만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과 복음은 항상 우리에게 ‘낯선 곳과 존재들 가운데’ 있음을 기억합시다.

우리 모두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잠시 묵상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멘.

*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을 알려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희망을 견고히 붙들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1독서, 창세 3:8-15 / 2독서, 2고린 4:13-5:1 / 복음, 마르 3:20-35

* 2018년 6월 10일, 연중 10주일(Third Sunday after Pentecost Proper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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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0 01:38 2018/06/10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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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나눔]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헌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오늘 복음 말씀은 유대인들의 안식일, 그러니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의 날인 주일에 해당하는 ‘중요한 날’에 대한 논쟁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에 대해 초기 교회의 스승인 아타나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함께 읽어봅시다.

“... 그러나 안식일과 관련된 법을 세우신 그분께서는 율법이 원래 의도했던 바를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을 위해서라면 예외적으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사람이 우물에 빠질 경우 밖으로 끌어내어도 괜찮았고, 사람만 아니라 소나 나귀의 경우에도 그러하였습니다. 이처럼 율법은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허용했고, 유대인은 안식일에도 음식을 장만했습니다.”
- 아타나시우스 <씨 뿌리는 이에 관한 강해> 16.,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Ⅲ>, 98쪽.

무슨 말일까요? 말 그대로 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날인 안식일, 그래서 지켜야 할 규칙들이 많은 안식일에도 ‘율법이 원래 의도했던 바에 합당하다면 예외가 허용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 오늘 복음서 말씀은 유대교에서 갱신된 종교로 갈라져 나온 그리스도교에 대한 ‘정당성 논쟁’을 말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유대교는 율법에 얽매여 보지 못하던 율법의 정신을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깨달아 볼 수 있게 되었다’라는 거죠.

달을 가리키는데 보라는 달은 안 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있는 당시 유대교 전통에 대한 비판이자 그리스도교가 가진 장점을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1독서인 신명기 5장 말씀처럼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종살이 시절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평등과 자유를 선물한 출애굽의 하느님을 기억하며 지키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해방의 날이자 평등과 자유의 날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과거 이집트 종살이 시절처럼 그 좋은 것들을 특정한 이들만 누리지 못하도록, 율법으로 ‘강제력’을 부여해 그 율법의 그늘 아래에서 상대적 약자들도 ‘안식일의 정신’을 맛보도록 했던 겁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강제력만 남고 그토록 중요한 안식일의 정신은 희미해졌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 강제력이 안식일에도 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러니깐 이스라엘 사회에서 작고 힘없는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는 멍에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불합리한 상황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를 향해 ‘안식일이 작고 힘없는 사람들을 살리고 있느냐, 죽이고 있느냐’고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그 질문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이 아닌 그 행위에 집중하며 수군거리고 예수님을 탄핵할 빌미만 찾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유대교로부터 갱신되어 시작된 그리스도교는 어땠을까요?

지난 2천년 동안 그리스도교는 ‘정신을 잘 담아낸 형식’을 지속적으로 갱신하여, 예수님 당시 유대교처럼 달을 보라는데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만 쳐다보고 있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았나요?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가 애써 지키고 있는 여러 형식은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선물한 그 ‘해방과 평등과 자유의 정신’을 잘 담아내고 있나요?

우리는 그런 정신을 담아낸 형식을 계속 갱신하며 복음을 지켜 전하고 있나요?

오늘날 우리들이 지켜 행하고 있는 것들은, 오늘 2독서인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살아서 약동하는 예수님의 생명’을 드러내고 있나요?

오늘 복음 말씀에 기록된 사건을 통해 초기 교회는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에게 질문했던 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반복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건 한 마디로 “뭣이 중헌디?”라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선물한 해방과 평등과 자유의 정신을 이 땅에 자리 잡은 교회와 모든 사회 안에 전하기 위해서 하느님과 제대로 동행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우리, 초기 교회의 스승 중 한 명인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가르침을 함께 읽는 것으로,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묻고 있는 바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봅시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떠넘긴 채 잠들지 말라고 나는 권고합니다. 그러나 부지런히 일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힘만으로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게으름 피우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당신 홀로 모든 것을 하지는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혼자만의 힘으로 모든 일을 하기를 바라지도 않으십니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맡겨 두지는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마태오 복음 강해> 82,4.,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Ⅲ>, 99쪽.

우리 기억합시다.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서만 일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 모두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잠시 묵상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멘.


* 본기도
구원의 하느님, 모든 민족에게 크신 뜻을 나타내시고 구원의 역사를 약속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여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1독서, 신명 5:12-15 / 2독서, 2고린 4:5-12 / 복음, 마르 2:23-3:6

* 2018년 6월 3일, 연중 9주일(Second Sunday after Pentecost Proper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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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8/06/08 02:47 2018/06/08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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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9) 나는 2018년에도 ‘성경은 일점 일획도 변개함 없이 가르치고 지켜야 한다’ 는 주장을 하는 이들을 보면 소름이 끼친다. 심지어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 나올 때도 있다.

그들이 강조하는 ‘일점 일획’ 가운데, 이 사회와 종교 그룹에서 기득권을 가진 자들에 의해 ‘해석되고 전해진 부분’이 있다는 건 ‘전혀 모르는 듯한 태도와 입장’으로 사는 사람들.

그런 이들이 목회자로 신학자로 일하고 있다니, 바로 그곳이 혼돈의 지옥아니겠는가.

그들에게는 상대적인 약자나 사회적 소수자들과 동행하시는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고 싶지 않을 거다.

왜? 그런 하느님을 보고 들으면, 자신들이 그토록 지키고 싶은 ‘일점 일획’이 어떤 ‘해석과 적용의 변화’를 겪어왔는지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는 말씀을 통해, 스스로 복된 소식의 완성으로 오셨다는 걸 알려주신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 우리도 그 예수님처럼 이 시대와 사회에서 복된 소식이 되어야 한다는 초기 교회의 전언.

그렇다면 이 시대와 사회에서 복된 소식으로, 예수님처럼 우리 스스로와 이웃을 살리는 복음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

더 이상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 박제된 문자주의자들. 말씀의 본 뜻을 변개하여 ‘박제된 문자주의’로 만드는 건 대체 누구일까.

개혁주의, 복음주의, 보수, 정통 등등 그럴 듯한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지만, 결국 자신들이 규정한 ‘일점 일획도 변개함 없이 벽돌로 만들어버린 성경’으로 상대적 약자나 사회적 소수자를 때려 죽이려는 그들을 나는 용서하기 어렵다.

* 덧. 이들은 대부분 비슷하게도 노동자, 미등록 이주민, 여성, 성소수자 , 장애인 등의 사회구성원에게 부정적이다. 시혜적인 태도를 보일 때도 있으나, 그 또한 매우 조건적이고 한시적인 경우에만 그렇다. 이들은 상대적 약자나 사회적 소수자의 입장이나 목소리에 유별난 반감을 보인다는 유사점이 있다.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태 5:18, 개역개정판)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12, 21, 공동번역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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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8/06/06 03:07 2018/06/06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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