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무지개 언약으로 안내하는 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우리는 오늘 교회력에 따라 사순1주일을 맞이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사순절기에 ‘죄’에 대해 돌아보고 그 영향력을 알아차리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죄 너머에 있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며 묵상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죄를 개인의 문제인 것처럼 접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구조나 사회와 얽힌 죄에 대해서는 잘 언급하지 않았죠.

혹시 구조나 사회와 얽힌 죄의 문제를 말하더라도 이분법적으로 나눠 ‘교회는 선, 사회는 악’이란 식으로 접근하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2018년을 살고 있는 우리는 죄의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왜냐면 죄는 종종 ‘여러 가지 권력관계가 얽힌 문제’에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죄의 문제는 대부분 우리 각자의 일상과 사회생활 가운데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들에서 발견됩니다.

아주 오래된 문제이었으나 최근 몇 년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성소수자나 여성 차별과 혐오 문제가 그런 문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런 문제는 우리 9개 나눔의집들이 오랫동안 싸워온 ‘가난과 낙인’이란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한정된 자원을 특정한 계층이나 사람들이 ‘독점’하기 위해 다른 계층이나 사람들을 ‘부족한 사람, 틀린 사람, 잘못된 사람’으로 낙인찍어 배제하고 소외시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더 가진 사람들에 의해 ‘인정’받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 인정을 통해 ‘정상’으로 변해야 한다고 가르쳐왔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왜곡된 가르침을 강화하고 확장시키는 일에 교회는 오랫동안 동조하거나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다행인 건 교회의 역사와 활동 가운데 그런 일만 있었던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 함께 오늘 2독서인 베드로의 첫째 편지 가운데 한 부분을 읽어 봅시다.

“그들은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을 때 하느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셨지만 끝내 순종하지 않던 자들입니다. 그 방주에 들어가 물에 빠지지 않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세례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세례는 몸에서 더러운 때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느님께 서약을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베드 3:20-21)

이 말씀처럼 세례는 단순히 ‘우리의 더러운 때를 벗고 겉만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사람으로 깨끗한 양심에 근거한 삶을 살겠다고 하느님께 서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삶을 살아온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작은 신앙 공동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하느님의 오래 참음으로 인해 노아가 만든 방주에 들어가 구원받은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신앙 공동체는 주류 교회 안에도 있었고, 때로는 이단이라 낙인찍히며 쫓겨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건 ‘오직 세례 받은 사람들답게 사느냐’는 문제이었습니다. ‘하느님께 서약한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사람으로 깨끗한 양심에 근거한 삶을 사는가’라는 게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과 신앙 공동체에게 세례란 감춰져 있던 관계가 드러나고 끊겼던 언약이 다시 이어짐을 뜻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스승 가운데 한 명인 히폴리투스는 세례를 단순히 한 개인의 문제나 교회의 승리로만 보지 않고 그 이상의 의미를 담은 것으로 소개했습니다. 같이 한 번 읽어 봅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세례만 받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옛 피조물이 새로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멀어진 인간을 왕권 아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늘이 갈라졌습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하늘의 천사들은 기쁨으로 가득 찼고, 땅의 병은 치유되었습니다. 감추어진 진리는 밝게 드러났고, 원수로 지내던 사람들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 히폴리투스 <거룩한 신현에 관한 설교> 6.,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Ⅲ>, 68쪽.
주님의 세례를 통해 옛 피조물이 새로워지기 시작합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화해가 이뤄지고, 하늘에는 천사들의 기쁨이 가득 차며 땅의 병은 치유됩니다. 감춰진 진리는 밝게 드러나고, 원수들은 친구가 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주님의 세례는, 그 세례에 동참하는 우리들의 세례는 개인적인 신앙 고백이며 개인을 넘어선 우주적인 선언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한 개인이자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으로 그렇게 사는 사람이 되겠다는 선언인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세례에 동참하는 의미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죄의 문제 또한 개인의 영역으로 한정하거나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며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느님께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으로는 죽으셨지만 영적으로는 다시 사셨습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1베드 3:18-19)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 주님’이란 신앙 고백은 2천 년 전 나자렛 땅에서 태어난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슬픔만이 아닙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지배자이었던 로마제국의 권세는 물론, 지배를 당하던 이스라엘 안에도 존재하던 종교 · 사회 · 문화 권력의 낙인과 공모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와 세례의 문제는 단순히 한 개인의 영역이나 이분법적인 관점에 갇히지 않습니다.

분명 우리 각자의 선택과 깊이 관련되어 있지만, 또한 그런 개인 너머에 있는 구조와 사회, 다시 말해서 우리 각자의 일상과 사회생활 가운데 ‘당연함’으로 여겨지는 것들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각자의 일상과 사회생활 가운데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우리 일상의 선택 가운데 ‘하느님께 서약한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사람으로 깨끗한 양심에 근거한 삶을 사는가’라는 질문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생활 관습이나 언행, 그로 인한 여러 선택들이,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차별이나 배제일지라도 사회적 낙인을 강화하는 거라면 단호하게 거절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인종 차별이나 출신지에 의한 차별, 낙인들은 우리 이주민 식구들이 흔하게 경험할 수 있는 사회적 낙인이자 차별입니다. 또한 우리도 또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죄입니다.

때로 이런 낙인과 차별은 우리 가운데 성역할을 당연하게 여기는 일에 스며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말하는 ‘남자는~, 여자는~, 성소수자는~’이란 선입견들이 그렇습니다.

죄는 저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일상과 선택 가운데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그 죄와 맞서는 사람으로 하느님께 서약한 세례 또한 우리 일상과 선택 가운데 의미를 갖고 작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일상 가운데 주님의 세례에 동참하는 세례 받은 사람으로 살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서 사는 사람이 됩니다. 그 하느님 나라는 ‘이미’ 주님의 세례를 통해 우리 가운데 ‘활짝’ 열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율법서도 읽었고 예언서도 읽었고 시편도 읽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말고는 그 어디에서도 ‘하느님 나라’라는 표현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주님께서 오신 다음에야 활짝 열렸습니다. 그에 관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가 17:21; 참조: 루가 10:9)”
- 히에로니무스 <마르코 복음 강해> 2.,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Ⅲ>, 75쪽.
그러므로 우리가 사순1주일에 세례를 통해 마귀와 세속과 정욕을 이기며 성령의 능력 안에 산다는 건, 우리 가운데 활짝 열린 하느님 나라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세례는 주님의 세례에 동참하는 것인데, 그 주님의 세례를 통해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활짝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무지개 언약을 기억하고 되새기며 이 땅의 모든 죄와 맞설 힘을 얻습니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타나면, 나는 그것을 보고 하느님과 땅에 살고 있는 모든 동물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계약을 기억할 것이다.” (창세 9:16)

이처럼 우리는 주님의 세례에 동참하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무지개 언약에도 동참하게 됩니다.

기억합시다. 우리는 주님의 세례에 동참하는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세례를 통해 우리는 우리 일상과 선택 가운데 개인적인 죄는 물론 이웃과의 관계나 사회구조와 생활 가운데 저지르게 되는 죄를 알아차리고 깨닫게 됩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그런 죄가 우리 생활과 언행, 당연하게 여기는 관습들 가운데 깊이 스며들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알아차린 죄와 맞서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서약한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사람으로 깨끗한 양심에 근거한 삶을 사는가”라는 질문을 놓치지 않아야 함을 알게 됩니다.

사순1주일, 우리는 우리 각자와 관계,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죄와 맞설 수 있는 힘을 우리가 받은 세례에서 찾습니다.

그 세례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 우리 각자와 온 우주의 죄를 이기시고 우리를 무지개 언약과 이어주는 주님의 세례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세례는 단순히 교회의 일원이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느님과 무지개 언약을 맺은 ‘언약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우리 각자는 물론 관계와 사회구조 가운데 있는 죄와 맞서는 문제입니다. 우리 언행과 관습 가운데 깊이 자리한 죄를 알아차리고 변화시켜 우리 가운데 활짝 열린 하느님 나라에 동참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잠시 묵상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멘.

* 본기도
생명의 하느님, 홍수로써 이 세상 죄악을 씻어내셨듯이 세례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나이다. 구하오니, 세례를 통하여 거듭난 우리가 마귀와 세속과 정욕을 이기며 성령의 능력 안에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1독서, 창세 9:8-17 / 2독서, 1베드 3:18-22 / 복음, 마르 1:9-15

* 2018년 2월 18일, 사순 1주일(First Sunday in L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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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8/02/19 00:50 2018/02/19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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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명절 최고의 득템 ㅋㅋㅋㅋ

40년도 더 된 옛날 사진. 여장하고 다녔던 동생들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내게도 이런 사진이 있었다니 ㅎㅎ

간절히 딸을 키우고 싶었던 엄니 덕에 우리 3형제는 종종 여장을 하고 다녔다. 장남이라며 양쪽 집안 어른들이 기겁하고 팔짝 뛰어도, 울 엄니는 ‘아이가 싫어하지 않는데~’ 라고 대답하며 아무렇지 않게 여자 옷을 입혔다고 ^^;;;

이런저런 큰일을 앞두고 있는 동생이 책상을 정리하다가 옛날 사진첩에서 찾은 어릴 적 내 사진~ 아, 내가 어릴 적에 이랬구나.. ^^ v

생각해 보면, 울 엄니는 당시 어른들에 비해 ‘지정 성별’에 대한 생각이 다른 편이었다. ‘남자는~ 여자는~’ 이란 말을 아예 안 하신 건 아니나, 당신이 겪은 삶의 굴곡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다르게 생각하는 편이셨다 ㅎㅎ

* 덧. 이 사진은 명절 때 동두천 외가에서 찍은 사진. 울 엄니는 명절 집안 행사에도 아무렇지 않게 3형제 여장을 고수하시기도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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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8/02/19 00:48 2018/02/19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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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2월 15일에 끄적인 글.

설 명절의 첫날. 짝꿍의 추천으로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 전시 중인 ‘알베르토 자코메티 전시’(ALBERTO GIACOMETTI EXHIBITION)로 시작했다.

거의 두 시간을 꽉 채워 천천히 관람하며 1950-1960년대 인간과 삶의 본질에 집중한 예술가의 이야기를 만났다.

마지막 ‘묵상의 방’에 들어서는 순간 마주한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람’(Walking Man, 1960) 석고 원본 조각. 그 독특한 조각은 말 그대로 사람을 ‘깊은 침묵과 명상’ 가운데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내게 전율로 다가온 조각은 자코메티 부인 ‘아네트 흉상’. 그 석고 조각의 ‘시선’. 정말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깊이와 미묘함으로 내 내면을 응시하는 듯한 느낌을 가진 조각이었다. 한참을 그 앞에 붙들려 있었다. 그리고 다른 곳에 있던 짝꿍의 손을 이끌어 그 시선을 마주해보기를 권했다.

그 움찔거림. 가라앉음. 미묘하고 지속적인 떨림. 내게는 조각가 자코메티가 그토록 강조했던 ‘생명력을 담은 시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외에도 전시장 곳곳에서 마주친 피카소와 자코메티 이야기는 재미는 물론, 이런저런 생각 거리를 던져줬다. 자코메티보다 20살 연상 천재 예술가 피카소의 시기와 허세 등등. 한 시대를 가득 채운 예술가들 뒤에 가려진 인간적 면모들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인간이란 존재의 근원에 집중했던 한 예술가. 청동 조각 안에 인간의 영혼과 생명력을 담아내려고 했던 사상가. 덜어내고 비워내고 지워가며 그 존재가 가진 본질에 다가가려고 노력했던 한 사람.

그럼에도 끊임없이 또 다른 여성을 찬미하고 집착하며 예술 영혼의 실마리를 얻었던 남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와 동행한 또 한 명의 자유로운 영혼 아네트.

인간과 존재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은 그를 잘 알지 못할지라도 한 번쯤 찾아가 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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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8/02/17 02:09 2018/02/17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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