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 2016년 9월 25일, 연중26주일 (Nineteenth Sunday after Pentecost)
* 1독서, 아모 6:1a, 4-7 / 2독서, 1디모 6:6-19 / 복음, 루가 16:19-31

“부자로 보이는 사람들은 소유한 게 많다하더라도 영혼은 여전히 가난합니다. 재산을 더 많이 쌓을수록 그들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더 많이 갈구합니다. 그러나 믿는 이는 가난하더라도 부유합니다. 역설적이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뿐임을 알며 그에 만족하는 사람은 부를 발로 짓밟듯 무시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666년 전인 350년경부터 예루살렘의 주교이었던 키릴루스가 쓴 것으로 전해지는 『예비신자 교리교육』 가운데 일부입니다.

오늘날 다시 읽으니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교회는 오래 전부터 ‘부자로 보이려는 탐욕’을 경계 하라고 가르쳤다는 점입니다. 그건 그만큼 교회 안에서도 교회 바깥 사회와 마찬가지로 ‘부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대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 오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신자들과 교회가 부자, 다시 말해서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을 우대하는 구조나 문화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사회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사회를 작동시키는 일반적인 규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회는 돈이 필요합니다. 그걸 ‘재정’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 재정을 더 많이 확보하여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용산 해방촌 나눔의집도 매월 백 몇 십만 원 가량 되는 임대료부터 크고 작은 정기적인 지출들이 있습니다. 임대료는 함께 공간을 나눠 쓰는 단체에서 일부를 분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을 비롯한 다양한 마이너리티 문제와 함께하는 활동과 성찰을 계속해온 나눔의집으로서는 여러 가지로 점점 버거워지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답을 찾아보지만, 결국 더 많이 소유한 단체가 되거나 더 많이 소유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걸 ‘더 많은 자본을 가져야 한다’ 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건 단순히 재정만을 뜻하진 않습니다. 재정을 포함한 ‘경제 자본’을 비롯해서, ‘문화 자본’이나 ‘사회(관계) 자본’ 그리고 ‘상징 자본’ 등 우리가 더 많이 가질수록 유리한 여러 형태의 자본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1독서인 아모스서, 2독서인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복음 말씀인 루가의 복음서가 공통적으로 이러한 ‘더 많이 소유하는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저만의 생각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로부터 ‘교회의 스승’이라 불리던 이들의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더 많이 가져야만 되는 세상. 더 많은 소유하는데 집중하는 사람들과 사회. 심지어 어떤 교회에서는 더 많이 소유할 수 있는 게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치며 강조하기도 합니다. 아니, 가만히 살펴보면 대부분의 교회가 더 많이 소유할 수 있는 게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런데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십니다. 신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문자적이고 사실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존재하는 천국과 지옥’에 대해 가르치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통해 교회가 오랜 시간동안 가르쳐온 것은 ‘더 많이 소유하는 문제에 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유에 대해 꽤 온건한 편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늘 복음 말씀인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재물이 아니라 악덕을, 풍요로움이 아니라 탐욕을, 재산이 아니라 탐욕을 두려워하라. 그들더러 아브라함처럼 많은 재산을 소유하되, 믿음으로 그것을 소유하라고 하십시오. 재물을 가지라고, 소유하라고, 그러나 재물에 소유당하지는 말라고 하십시오.” (아우구스티누스 설교집 299E, 5)

그런데 저는 오늘 복음 말씀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설 앞에서 길을 잃습니다. ‘더 많은 걸 소유하는데 믿음으로 소유하라. 그러나 재물에 소유당하지는 말라.’ 참 듣기 좋은 가르침인데 이걸 제 삶에 적용하려니 난감할 뿐입니다.

더 많은 걸 소유하는 문제에 있어서 끝은 어딘가? 믿음으로 소유한다는 게 뭔가? 재물에 소유당하지 않는 건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

그래서 많은 신자들과 교회가 간단한 해법을 제시합니다. ‘좋은 일을 하는 교회로 가져오십시오. 그러면 교회가 다 알아서 해줄 겁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하거나 여러 형태의 투자를 해서, 심지어는 투기를 해서라도 더 많은 소유를 추구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더 많이 교회로 가져갔습니다. 그렇게 이 땅의 교회나 교회에서 운영하는 여러 기관들은 그 덩치와 영향력이 커져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과 교회는 왜 교회 바깥의 사람들이나 사회와 다를 바 없다고 손가락질 받는 걸까요? 아니, 때로는 오히려 더 악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일까요?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얼마 전에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던 우리나라 노동자들과 노동 인권의 문제를 다룬 〈송곳〉이라는 만화에서 나오는 대사입니다.

저는 ‘더 많은 걸 소유하는데 믿음으로 소유하라. 그러나 재물에 소유당하지는 말라’ 는 가르침에는 중요한 것이 하나 빠져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바로 ‘누구의 곁에서 소유의 문제를 바라보고 이해하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1독서의 선지자 아모스나 2독서의 사도 바울로 그리고 오늘 설교를 시작하며 인용한 예루살렘의 주교 키릴루스는 모두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과 더 많이 소유하는 문제’는 어울리기 어렵다고 강조합니다.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은 더 많이 소유한 사람들의 곁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께서 라자로를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전하는 것처럼, 신자들과 교회는 더 많이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의 곁에서 바라보고 이해한 것들을 가르치며 실천해야 합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에서 더 많이 소유한 부자는 이름 없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부자의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더 많이 소유하는 사람들의 반대편에 등장하는 라자로는 다릅니다. ‘하느님이 도우신다’는 이름처럼, 하느님이 도와야만 살아갈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라자로는 이름을 가진 존재로 등장합니다.

놀라운 건 이 땅의 상식이나 규칙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도움이 간절해서 ‘사람들이 부자의 집 대문간에 들어다 놓은 라자로’가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점입니다(루가 16:20).

이런 역설적인 예수님의 가르침은 부자의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 나아가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은 부자들의 자리에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더 많이 소유하는 문제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에겐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은 결코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성서에서 ‘믿는다’는 말은 ‘사랑한다’라고도 바꿔도 되는데, 더 많이 소유하는 일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1%의 부자들에게 99%의 가난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그건 차라리 쉬운 질문일 수 있습니다. 만약에 99%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당신보다 더 ‘을’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라고 선언한다면 어떨까요?

‘을 중의 을’인 라자로의 삶에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임해 결국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것이라는 예수님의 선언은 그만큼 충격적입니다. 더 많이 소유하는데 집중하고 더 ‘갑’이 되는 걸 추구하는 사람들과 사회는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상아 침상에서 뒹굴고 보료 위에서 기지개를 켜며 양떼 가운데서 양새끼를 골라잡아 먹고 외양간에서 송아지를 잡아먹는 것들, 제가 마치 다윗이나 된 듯 악기를 새로 만들고 거문고를 뜯으며 제 멋에 겨워 흥얼거리는 것들, 몸에는 값비싼 향유를 바르고 술은 대접으로 퍼 마시며 요셉 가문이 망하는 것쯤 아랑곳도 하지 않는 것들” 이라 불릴 수 없는 사람들의 편에서만 보이고 이해할 수 있는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이 있습니다(아모 6:4-6).

그렇게 가난한 사람으로 살아야만 만날 수 있는 하느님의 품이 있습니다.

그 가르침과 품을 만나려면 이 땅의 수많은 부자들, 커다란 교회와 99%의 사람들이 가진 평균보다 더 좋은 집과 좋은 차를 가지고 사는 1%의 사람들과는 ‘다른 길’로 가야만 합니다. 지금 내가 갖고 있거나 추구하는 여러 자본들이 정당한 것인지 하느님 앞에서 검토하고 또 검토해야만 합니다.

오늘의 복음은 더 많이 소유하는 문제에 전부를 다하는 사람들과 사회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이 복음은 단순히 ‘지금 가난한가, 부유한가’ 라는 문제를 넘어섭니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한 사람이 존엄하게 사는데 필요한 것 이상을 추구하느라 만족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과 사회는 끊임없이 자신들의 허기를 채우는데 집중하느라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라자로’라는 이름처럼 ‘하느님이 도우신다’는 것을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자리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 자리는 가난한 자리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정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는 가난한 사람의 삶입니다(1디모 6:11).

그 자리에서 바라보고 이해되는 것들을 통해 만나는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만이, 우리를 ‘라자로를 품은 아브라함의 품’ 같은 하느님의 품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복음은 단순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서는 곳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그럼 다른 풍경이 보일 거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더 가난하고 약한 작은 사람들이 보는 풍경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더 가난하고 약한 을들의 편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그런 사람에게 당신의 은총과 축복이 있을 거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 모두 오늘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잠시 묵상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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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4 21:45 2016/09/24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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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space)과 장소(place)의 차이는 무엇일까?

계속 공명하는 가운데 구성되고 기억된다. 그렇게 서로를 의미있게 존재케 하며 변해가는 ‘장소와 ‘다양한 그곳에 사는 사람들.

지역운동을 하는 활동가는 물론이고, 동네와 도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겐 중요한 질문들이다. (‘도시와 선교를 말하는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 )

용산 해방촌 나눔의집.

우리는 용산과 해방촌의 ‘언저리 사람들이 더 주변부로 밀려나지 않도록 연대하며 함께살기 위해 존재한다. 그 때문에 용산, 그 중에서도 해방촌을 중심으로 진행 중인 부정적 맥락의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해 우려하며 깊이 성찰하려고 한다. 우리는 사회 속에 존재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는 ‘교회란 왜 존재하는가? 교회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 앞에서 다양하게 표현되는 ‘신앙적 커뮤니티’다. 그래서 이 지역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동네 안팎의 사람들과 함께, 지역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대해 행동하며 답을 찾기 위해 첫 걸음을 시작했다.

열 다섯 명 정도 되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시작한 동행. 여럿이 한 걸음.

이 걸음으로 사회 속의 교회이자 교회와 함께 변화되는 사회로 조금씩 나아가길 소망한다. 두 손 모아, 간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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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3 00:57 2016/09/23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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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후원 계좌번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위험.. #속닥속닥 ㅋㅋ )

박요한 기자님이 용산 해방촌 나눔의집 인터뷰 기사가 실린 신문을 보내 주셨어요.

사회적 소수자와 함께하는 활동은 시혜적이어서는 안 되고,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이 가르치는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강조를 잊지 않고 넣어 주셨네요 ^^

‘연대’란 ‘공존과 공생’이라는 점도 빼지 않고 넣어 주셨고요~

특별히 이슈 파이팅을 해야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저는 개신교 언론과 인터뷰할 때 신중한 편입니다. 그저 의견 하나로 인용되거나 구색 맞추기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그 동네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내용이라 이슈 파이팅을 해야하는 내용이라면 그 또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또 말했는데도 다르게 나간다면 얘긴 달라지죠 ^^

그런 점에서 인터뷰 기사란 특징 때문에 좋은 면만 나왔지만, 이런 개신교 언론 기자 분들이라면 열심히(?) 협조해 드리고 싶네요 ㅎㅎ

시간 여유 되시는 분들은 한 번 읽어 보소서~ 제가 작년 12월부터 길찾는교회와 겸임하여 동행하는 용산 해방촌 나눔의집 이야기입니다 ^^

* 후원 계좌: 우리은행 / 1005-001-721747 / 용산 나눔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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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취약계층인 ‘언저리 사람들’과의 공생 위한 ‘디딤돌’ 역할”
- 필리핀 이주민 커뮤니티 형성, 주민과의 갈등 해결 방안 모색 -

 서울시 용산구 해방촌에 위치한 대한성공회 용산 나눔의집(원장=민김종훈 신부·사진)은 국내 이주노동자들과 사회적소수자와의 공존과 공생을 위한 노력을 하며 아끼지 않고 있다.

 용산 나눔의집은 지난 2003년 최준기 신부가 “용산지역의 사회적 소수자와 함께 살겠다”는 모토로 남영동에서 처음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 중국동포들을 대상으로 펼쳤던 활동은 이후 중국동포들이 대림동으로 대거 이동하자 새로이 들어온 이주민들을 위한 활동으로 자연스레 바뀌었다. 이후 상대적인 주거환경이 좋지 않지만 주거비용이 싼 남영동과 후암동, 동자동을 중심으로 자리잡은 이주민들과 지역 저소득층 주민들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면서 푸드뱅크와 가정결연, 이주민상담센터인 샬롬하우스를 통해 관계를 형성해 왔다.

 지난 2015년 민김종훈 신부가 부임하면서 나눔의집은 그동안의 활동을 재점검하면서 앞으로의 활동방향을 다잡았다. 민김 신부는 “오랫동안 ‘가난한 사람들’이라 호명하는 소외계층이나 취약계층을 다시 살폈다. 그리고 용산지역에서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할 가난한 사람들은 저소득층, 이주민과 난민, 미등록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홀몸 어르신들과 한부모가정, 청년빈곤층이라는 것을 재확인 했다”며, “우리는 그들은 ‘언저리 사람들’이라 명명하고 함께 살기 위해 해야할 일들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언저리 사람들이 온전한 존재로 존중받으며 동등하되 독특한 이웃으로 함께 살 수 있도록 또 하나의 ‘디딤돌’로 존재하는게 용산에 자리 잡은 나눔의집의 존재 이유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에 민김 신부는 올해 초 해방촌으로 옮겨와 ‘용산과 해방촌 언저리 사람들’과 함께 살며 함께 꾸는 꿈을 현실화 시키기 위한 방법을 마련하고 있다. 특히 용산 나눔의집은 필리핀 이주민들의 커뮤니티로서의 장을 열어주었다. 민김 신부는 “용산에 몰려온 필리핀 이주민들이 하나 둘 모이면서 커뮤니티를 이루게 됐다. 마치 미국의 한인들이 교회에 모여 커뮤니티를 형성하듯이, 필리핀 이주민들도 나눔의집에서 자발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했다”며, “초창기에는 비자문제나 노동상담을 많이 했다. 그러나 이제 전문성을 갖춘 단체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필리핀 가족 2세대와 이주민 여성들에게 초점을 맞춘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비공식적인 이주민 비율이 10%에 이를 정도로 다양한 이주민들로 구성된 지역에서 ‘다양한 소수자성이 교차하며 연대하는 시공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역의 활동단체들과 연계해 공동 프로그램과 지역활동, 주민조직 사업에 함께 참석하고 있다.

 현재 용산 나눔의집은 이주민 2세대와 여성들을 위한 방안마련을 위한 연구가 한참이다. 민김 신부는 “사회복지적 형태로 이주민들을 도와줄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주민 개인과 가족들을 심리상담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며, “해방촌 지역에서 활동을 하는 시민단체들이 많이 있다. 이 단체들과 연계해서 ‘해방촌 공부/탐구모임’을 만들었다. 이 지역에 대한 사회학적이고 인류학적인, 다각적인 방면에서의 공부와 연구를 통해 이주민들에 대한 시선을 긍정적으로 만드는 것이 첫번째 목표이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나눔의집은 이주민 어린이와 청소년 및 성인들의 참여로 진행 중인 한국어교실을 ‘징검다리 사업’으로 전환하여 이주민과 지역주민들과의 접점을 좁히고 있다. 이주민과 저소득층 어린이 및 청소년들을 위한 사회복지 사례분석과 심리상담 프로젝트를 통해 저소득층과 이주민 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구조를 연대의 구조로 재편하기 위한 방안을 연구중이다.

 민김종훈 신부는 사회적 소수자인 ‘언저리 사람들’에 대한 활동이 결코 시혜적이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가난한 사람이라 해서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사회구조 속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사람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복지가 선교의 도구로 사용되거나 사혜적 관점으로 갑을관계가 형성되는 것에 대해 거부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성서적 관계라는 것이 나눔의집의 활동 기반이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 동등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민김 신부는 “이러한 나눔의집의 활동은 성공회에서의 성육신 정신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인간들에게 오셨듯이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함께 지내며 공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생이 푸드뱅크와 가정결연 등으로 이어졌고, 지금도 사회적 소수자들과 공존하고 공생하며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전했다.

[ 기독교신문 / 2016년 9월 11일 / 주간 제230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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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6/09/21 22:33 2016/09/21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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